오늘의 문장

야구, 넛지, 그리고 촛불(2017년 12월 22일)

divicom 2017. 12. 22. 11:09

박근혜 씨가 탄핵으로 해임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새 대통령을 뽑으러 투표장에 갔을 겁니다.


12월 달력에는 일요일 말고도 두 개의 '빨간 날'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성탄절, 하나는 대통령선거일입니다.

그러나 방을 벗어난 촛불은 거리의 어둠을 밝혔고 박근혜 씨는 영어의 몸이 되었으며, 

12월 달력의 '빨간 날' 하나는 이제 웃음을 자아냅니다. 


오늘은 '동지'... 악귀 쫓는 팥죽 덕에 나라가 좀 평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래는 오늘 자유칼럼에서 보내준 김홍묵 선배의 글입니다.

공감 되는 부분이 많아 옮겨둡니다.




www.freecolumn.co.kr

말 아닌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2017.12.22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농아 야구 선수.
처음에는 ‘바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피눈물 나는 연습과 노력 끝에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인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도루를 한 도루왕이 되었습니다. 미국 야구 선수 윌리엄 호이(William Hoy 1862~1961)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야구 심판들은 장애를 가진 선수들을 위해 ‘볼’과 ‘스트라이크’ ‘아웃’ 등의 판정을 할 때 말과 수신호를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수신호는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말만으로 세상을 바꾼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호이는 오직 행동만으로 야구 경기에서 심판의 관행을 바꾸고 재미를 더해 주는 변화를 이끌어 냈습니다. ‘당신이 바뀌면 세상이 당신을 위해 바뀔 것’이라고 한 미국 법률가 잉거솔(Robert Green Ingersol 1833~1899)의 예단을 실천한 주인공입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미국의 홈런왕 행크 애런(Hank Aaron 1934~). 1952년부터 1976년까지 프로 선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755개의 홈런을 친 그는 베이브 루스(Babe Ruth)를 능가한 야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예는 행크 애런 상(賞)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홈런을 많이 쳤지만 단 한 번도 담장 너머로 날아가는 공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1루까지 열심히 달리기만 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내가 친 공이 홈런이 되는지 바라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막시무스의 <인간으로 유쾌하게 사는 법> 참조)

넛지(nudge)라는 말이 짜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의 선구자 리처드 탈러(혹은 세일러 Richard Thaler 1945~,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의 책 제목이기도 한 넛지는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는 뜻입니다. 그는 책에서 넛지란 ‘똑똑한 선택을 유도하는 선택설계의 기술’ ‘선택을 이끄는 부드러운 힘’이라고 했습니다.
탈러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공항 소변기에 붙여놓은 파리 모양 스티커가 밖으로 튀어나가는 소변 량을 80%나 줄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한 예로 들었습니다. 

스키폴 공항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아래쪽에 처음 붙인 파리 스티커는 백 마디 말이나 글보다 획기적인 소변 비산 방지 효과가 있다는 결과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젠 우리나라 화장실에도 낯설지 않은 파리 스티커이지만, 아직도 효율이 적은 경고성 문자 스티커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총은 장총이 아니라 100% 권총입니다.’
‘오줌 한 줄기 골인 못하면서 한국 축구의 골 결정력을 탓하지 마라.’

인간은 수천 년 동안 수만 가지의 몸짓언어(body language)를 창안 개발해 왔습니다. 
△긍정적 넛지~합장, 악수, 박수, 고개 끄덕이기, 하이파이브, 하트 만들기, 엄지와 검지로 V자 만들기, 윙크, 커플 링, 커플 T, 손가락 약속, 엄지 세우기. 
△부정적 넛지~눈 흘기기, 째려보기, 고개 흔들기, 눈 부라리기, 입술 삐죽거리기, 묵비권 행사, 중지 세우기, 주먹 뿔끈 쥐기.
△경고성 넛지~눈감기, 아랫입술 깨물기, 헛기침, 인기척, 검지로 입술 닫기. 고개 가로젓기.

이밖에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넛지에 파묻혀 지냅니다. 관심이 없을 때 먼 산을 바라보든가, 멋쩍을 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거나 머리를 긁적거립니다. 적의 침범을 알리는 봉수대의 역할은 없어졌지만 교통 신호등과 수신호, 자동차의 점멸등 비상등 브레이크 등, 기차 선박의 출발 도착이나 출입항을 알리는 기적과 뱃고동 소리, 민방위훈련 사이렌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전장에서 달려와 그리스의 승전을 알리고는 숨진 한 병사를 기리는 마라톤 경기는 오늘날 올림픽게임의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그리스 병사의 죽음이나 호이·애런의 필사적 노력 끝에 만들어졌든, 아니면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의 발상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든 넛지 현상은 인간의 헛짓과 에너지를 줄여주고 편리하게 만드는 시그널입니다. 또한 언어의 번롱(飜弄)이 아닌 행동이 만들어낸 사회통합의 신호입니다.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바로 과거입니다. 애런의 말처럼 공을 친 다음 눈에 힘을 주고 뚫어지게 쳐다보거나 열심히 기도한다고 담장 안에 떨어질 공이 담장을 넘어갈 리 없습니다. ‘과거는 부도난 수표이며, 미래는 약속어음에 불과하다’고 한 잠언대로.

엊그제 마지막 남은 12월 달력을 쳐다보다 열적은 웃음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빨간 글씨로 인쇄된 날짜 20 밑에 적힌 ‘대통령 선거일’ 표시가 뜬금없어 보였습니다. ‘촛불’에 그을려 이미 부도난 수표, 불가역적 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촛불은 인간의 생명을 지켜 주는 소금처럼 스스로 녹으면서 세상을 밝혀 주는 희생의 표상입니다. 그 촛불을 우리가 주도한 혁명의 불꽃이라고 강변하거나, 촛불에 안채도 사랑채도 다 태우고 길바닥에 나앉은 무리들의 아우성에도 쓴웃음이 나옵니다. 영국 속담처럼 촛불은 스스로를 비치지 않는다는데도,

빅토리아폭포를 발견한 영국 탐험가이자 선교사인 리빙스턴(David Livingston 1813~1873)의 일화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줍니다.
1840년 런던 전도협회 의료선교사로 남아프리카에 파견된 그는 길도 없는 정글에 도착해 잘 도착했다는 편지를 선교회에 보냈습니다. 선교회는 오지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면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겠다고 답장을 보내 왔습니다. 리빙스턴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만들어진 길이 있다고 해야만 올 사람은 필요 없고, 길이 없어도 올 사람이 필요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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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