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피아니스트를 살린 사람들(2017년 10월 19일)

divicom 2017. 10. 19. 08:05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일 겁니다. 

사람부터 작은 벌레까지, 모든 생명은 한 식구이고 식구가 식구를 구하는 건 당연하면서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조금 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며 감동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연주하다 휴식 시간에 일어서던 연주자가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었는데, 

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무대로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한 후 병원으로 옮겼고, 그 덕에

쓰러졌던 연주자가 멀쩡하게 회복됐다고 합니다. 


오래 전 제가 미국대사관에서 전문위원으로 근무할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어떤 단체에서 미국 대사대리를 초청해 연설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행사 시작 조금 전에 대사대리와 함께 도착해서 준비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던 단체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습니다. 

한국의 유명 인사들이 모인 그 자리엔 몇 명의 의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몇 분 전에 인사를 나눴던 인사 한 사람이 퍽 쓰러졌습니다. 

어젯밤 예술의 전당 무대 위에서 있었던 일과 꼭 같았습니다. 

그때 그 자리엔 양의사들과 한의사들이 있었는데, 어제는 무대와 객석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그때는 몸이 닿을 듯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사도 쓰러진 사람을 돌보지 않고 강 건너 불을 보듯 가만히 있었습니다. 

쓰러진 사람의 넥타이와 허리띠를 풀고 구두를 벗긴 게 의사 중 하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날 저는 두 가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질 수 있다는 것, 

둘째는 의사들이 쓰러진 사람에게 아무런 응급조치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 아무 일도 하지 못했던 제가 두고두고 부끄러웠습니다.


쓰러진 사람은 119응급차로 실려갔고 말을 못하게 된 채 오랫동안 투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 온전히 회복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그 사건에 대해 들은 사람들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의사들이 쓰러진 사람을 손대지 않은 건 만일의 경우 자신이 지게 될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 그랬을까요?

어쨌든 그 사건은 의사에 대한 제 생각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래에 어젯밤 사건이 실린 동아일보 기사를 옮겨두며, 피아니스트를 구한 분들께 큰 박수를 보냅니다.



[단독]예술의전당 공연중 쓰러져 심정지된 피아니스트.. 관객 응급처치-심장충격기가 살렸다

입력 2017.10.19. 03:02 수정 2017.10.19. 07:21

17일 오후 8시 40분경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서울챔버오케스트라의 90회 정기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인터미션(휴식시간) 전 마지막 곡인 멘델스존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연주가 끝나자 700명 가까운 관객의 박수가 쏟아졌다. 앙코르 연주까지 끝난 뒤 다시 박수가 이어졌고 피아노 연주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술의전당 사장을 지낸 김용배 추계예술대 교수(63)였다.

그런데 일어서던 김 교수가 갑자기 왼쪽으로 쓰러졌다. 고목나무처럼 뻣뻣한 모습이었다. 놀란 단원 중 일부가 악기를 바닥에 놓고 달려갔다. 무대 옆에서 공연장 직원과 기획사 관계자가 뛰어왔다. 모두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 섣불리 손을 쓰지 못했다.

그때 객석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무대로 올라왔다. 공연을 보던 김진용 씨(49)였다. 내과 전문의 출신인 김 씨는 현재 다국적 제약회사인 한국노바티스 의학부의 전무로 일하며 고대안암병원 국제진료센터 교수도 맡고 있다. 그는 이날 무대에서 약 20m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김 씨는 김 교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앙코르 연주 때 목격한 김 교수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다.

“눈떠 보세요!” 김 씨가 외쳤다. 김 교수의 의식과 호흡은 없었다. 맥박도 잡히지 않았다. 심장이 멎은 것이다. 김 씨는 주변에 “119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동시에 김 교수를 똑바로 눕힌 뒤 허리띠와 셔츠 등을 풀었다. 그리고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두 손으로 가슴을 강하게 누르며 김 씨는 예술의전당 직원에게 “입구에 자동심장충격기(AED)가 있던데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미끄러운 무대 위에서 흉부압박은 쉽지 않았다. 김 씨는 바지를 걷고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짓눌린 맨살에 통증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계속 가슴을 눌렀지만 3분 가까이 지나도 변화가 없었다. 3분 넘게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뇌 손상 가능성이 크다. 김 씨의 어깨가 아파오면서 불안감이 커졌다. 그때 객석에서 2명이 올라왔다. 서울 양병원 외과 전문의 허창호 씨(31)와 간호사라고 밝힌 여성 1명이었다. 두 사람은 김 씨를 도와 번갈아 가며 심폐소생술을 했다.

곧이어 예술의전당 직원들이 AED를 가져왔다. 김 씨는 3분 간격으로 두 차례 작동시켰다. 그제야 김 교수의 심장이 가까스로 뛰기 시작했다. 호흡이 다시 돌아오면서 서서히 의식도 찾았다. 하지만 김 씨는 “아직 안심하면 안 된다”라며 계속 상태를 살폈다.

오후 8시 50분경 구급대원들이 도착했다. 김 씨는 상황을 설명하고 허 씨와 함께 구급차에 올랐다. 상태가 다시 나빠질까 봐 병원으로 가는 내내 김 교수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히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김 교수는 상태가 호전돼 18일 일반병실로 옮겨 회복 중이다. 김 교수는 “가슴이 좀 아프지만 이제는 멀쩡하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심장이 멎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며 “나를 살려준 세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김 씨와 허 씨 모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남아시아 지진해일 현장 등 다양한 해외 재난 현장 등에서 의료봉사를 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특히 예술의전당에 있었던 AED의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공공기관에 AED를 설치해 봐야 얼마나 도움이 되겠느냐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경험하고 마음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의사로서 훈련받은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허 씨도 “예술의전당 직원들이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도와준 덕분”이라며 “누구나 교육을 받으면 우리처럼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