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김남주의 졸업장 (2010년 6월 10일)

divicom 2010. 6. 10. 22:46

전남대학교가 고 김남주 시인을 학교의 명예를 빛낸 동문으로 뒤늦게 선정하여 '용봉인 명예 대상'이라는 상과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의 시집을 펼칩니다. 한국일보엔 그가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했다고 하지만, 그의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엔 그가 광주일고를 거쳐 전남대에 진학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쨌거나 전남대에 입학한 게 1969년이니 41년만의 졸업인 셈입니다. 김윤수 총장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고인의 치열한 삶에 뒤늦게나마 조그만 위로의 표시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게 1994년이니 보통 뒤늦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194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습니다.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과 '고발'을 제작ㆍ배포하다 구속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는데, 한국일보는 그때가 1972년이라고 한겨레 신문은 1973년이라고 합니다. 1974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79년 소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석방되었고, 1994년 2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발한 문학과 사회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시는 470편에 이르는데 그 중 300여 편은 옥중에서 우유곽이나 화장지 조각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말기 최대의 공안사건으로 1979년 10월부터 11월에 걸쳐 84명이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공안당국은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으로 규정,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으로 처벌했으나, 2006년 3월 김남주를 비롯한 관련자 29명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었습니다.

 

월화수목 일하고 금토일엔 휴식하는 세상을 꿈꾸며 아들 이름을 토일(土日)로 지었던 김남주.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시를 무기로 삼았던 그가 때로 얼마나 섬세한 서정을 보여주는지 눈물겹습니다. 독재의 시대 때문에 뛰어난 서정 시인 하나가 스스로 민주화의 제물이 되었던 거지요. <나의 칼 나의 피>에 실린 '솔직이 말해서'의 전반부입니다. 그러고보니 토일군도 지금쯤은 멋진 청년으로 자랐겠네요.

 

"솔직이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