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즐거운 산책

'거울'과 회색(2016년 9월 4일)

divicom 2016. 9. 5. 21:55

오늘 tbs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에서는 '회색'에 대해 생각해보고, 에밀레의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Santa Lucia', 최양숙 씨의 '가을 편지'등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었습니다.


3부 시작할 때는 레너드 코헨의 'In My Secret Life'를 듣고, 천재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9월은 가을이 시작하는 달이고 가을은 '거울'을 보는 달이니까요. 여름엔 작열하는 태양과 싸우느라 하루하루 

살아내기에도 바빴지만, 이제 서늘한 바람이 부니 걸음을 멈추고 자신과, 자신이 처한 곳을 둘러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거울을 보게 되는 거지요. 


거울에는 또 한 번의 여름을 살아낸 얼굴이 보입니다. 그 얼굴을 보고 만족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불만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저 사람, 나하고 닮긴 했는데 나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하는데요, 사람은 입체인데 거울은 평면이니까, 거울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면 거울은 사람의 외모보다는 내면을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거울이 있든 없든 우리는 늘 우리 자신,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남들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지만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남들이 

훌륭한 일을 했다고 치켜줄 때 오히려 부끄럽기도 하고, 남들이 잘못했다고 비난할 때 당당할 수도 있지요


이 시는 193310월에 가톨릭 청년에 발표됐는데, 3년 후 이상은 <여성>이라는 잡지에 명경이라는 시도 발표했습니다. 명경은 거울을 일컫는 한자말인데요, 이 시에는 울어도 젖지 않고 맞대고 웃어도 휘지 않고 장미처럼 착착 접힌 귀/들여다보아도 들여다보아도 조용한 세상이 맑기만 하고/코로는 피로한 향기가 오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비평가들은 거울 속 세상과 거울 밖의 세상을 대비시켜 무의식과 의식의 단절, 자신이 보는 자신과 남이 보는 자신의 차이를 암시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의식적 자아와 무의식적 자아의 소통불가를 나타낸다고도 하지만, 비평가들의 말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냥 시간 날 때 이상의 거울명경’을 읽어보면 되겠지요. 자꾸 소리 

내어 읽다보면 어느 순간 시가 가슴으로 푹 들어오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요.


'책방산책' 시간에는 권태현 출판평론가가 오종우 교수가 쓴무엇이 인간인가』와 백영옥 씨의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오늘 들려드린 음악 명단은 tbs 홈페이지(tbs.seoul.kr) '즐거운 산책...'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에 제 칼럼 '들여다보기'에서 읽어드린 '회색'을 옮겨둡니다. 



회색


밤새 비 내리고 난 새벽,

하늘은 회색의 향연입니다.

 

비둘기의 날개와 고려청자와 갓 구운 기와,

그 모든 회색이 하늘을 가로지릅니다.

회색 무지개는 일곱 색깔 무지개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회색은 노인의 색이요, 기회주의자의 색이라는 말도 있지만

저 하늘은 세파에 지친 노인도 아니고

하양과 검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기회주의자도 아닙니다.

 

저 푸른 회색이 밤새 눈물 쏟고 가벼워진 마음이라면,

저 먹물 닮은 회색은 겸손과 깨달음을 구하는

수도자들의 의복이겠지요.

 

저 기와 빛은 뜨겁게 타고 남은 시간의 그림자이고,

저 은빛어린 회색은 쓰임새 많지만 위험한 납의 빛깔이자

한때는 납보다 더 위험했던 애인의 머리칼입니다.

 

빨강이나 노랑과 달리 홀로는 될 수 없는 회색,

저 하늘빛이 저리도 아름다운 건

얽히고설킨 우리들의 삶을 닮아서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