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젠 오랜만에 봄 햇살이 쏟아지는 명동을 걸었습니다. 굵은 길, 가는 길, 혈관 같은 골목마다 인파가 가득했습니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 우울해 보이는 얼굴,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 길을 잃은 듯 보이는 사람, 천국을 파는 사람, 씻지 않은 과일로 생과일 주스를 만들어 파는 사람, 바닥에 떨어진 고구마 튀김을 긁어 모아 매대의 튀김에 섞는 사람... 너무 이른 죽음을 죽은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사람도 풍경처럼 생각을 부추겼습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니 오래 전에 번역했던 책, 이언 피어스(Iain Pears)의 <스키피오의 꿈(The Dream of Scipio)>이 떠올랐습니다. 여기 그 책의 역자 서문을 옮겨 봅니다. 옮기고 보니 그리 오래 전도 아니네요. 겨우 2006년. 그런데 한 십년 전처럼 느껴지는 건 지난 사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겠지요?
<스키피오의 꿈> 역자 서문
<스키피오의 꿈>은 사람을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이 책을 집어 드는 사람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인터넷과 정보의 파도에도 불구하고 그 파도 아래 저 깊은 곳, 삶의 심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심연의 기저를 이루는 질문과 씨름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은 이 책의 독자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어진 지성의 상속자임을 뜻합니다.
이언 피어스가 이 소설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란 무엇”이며, “문명이란 무엇인가?” 물을 뿐만 아니라 “문명이 사경死境에 빠졌을 때 문명화된 인간, 즉 교양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재차 묻습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이 시대 많은 작가들이 묻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것이 이 작품을 지적인 소설이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책을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이 있습니다. 뛰어난 미술사가이며 저널리스트인 이언 피어스라는 작가와 <핑거포스트 1663> 같은 전작들로 인해 지레 겁을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다양하여 우리 시대 어느 작품보다 화려한 씨줄과 날줄의 엮임을 보여주기 때문일 겁니다. 소설은 로마 제국이 쇠망해가던 5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던 14세기, 그리고 나치가 기승을 부리던 20세기를 종횡무진으로 오갑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각 시대의 풍경과 에피소드가 모두 프로방스와 그 주변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한때 로마의 속주였던 프로방스는 지금의 프랑스 남동부 지역입니다.
5세기의 주인공은 로마 귀족 히포마네스 만리우스와 그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철학 스승 소피아입니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14세기 프로방스의 시인인 올리비에 드 노옌과 그가 사랑하는 유대인 하녀 레베카에게로, 또 20세기 프랑스의 고전학자 쥘리앵 바뇌브와 화가인 그의 연인 줄리아 브론슨에게로 이어집니다. 3부로 나뉘어 있는 이 책에서, 이야기 전개는 세 시대를 넘나들며 이루어집니다. 다소 복잡한 구조이지만 주눅 들지 않고 읽다보면 곧 자연스런 흐름을 타게 됩니다.
이 작품을 어렵다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허구적 인물들이 역사에 실재했던 인물들과 섞이어 관계를 맺기 때문일 겁니다. 자칫하면 누가 실재했던 인물이며 누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인물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 자체보다는 그들이 하는 말과 행위를 통해 작품의 주제가 표현됨을 생각할 때, 그런 혼란에 크게 마음 쓸 필요는 없습니다. 모두 허구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읽는다 해도 작품의 주제를 파악하고 감동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예술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고 하는 T.S. 엘리엇의 말은 여기서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누가 허구의 인물이며 누가 실존했던 인물인지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 서두에 중요한 ‘등장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했습니다.
요즘과 같은 정보의 시대에는 문학도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이 작품과 같은 팩션 (fact + fiction)을 읽는 독자들 사이에선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열망이 높습니다. 그 열망에 부응하고자 본문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나 개념, 사건 등에 관한 “주(註)”를 본문 아래에 간략하게 달아 놓았고, 좀더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는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역사 해설’로 부연해두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싶은 마음과 이 책이 논문이 아니고 소설이라는 인식 사이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이 책이 어렵다고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작가가 한국어처럼 영어와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가진 언어로 번역될 경우를 고려하지 않고 (어느 작가인들 그러겠습니까?) 자신이 쓰고 싶은 문체로 생각을 펼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가능하면 복문을 단문으로 나누었습니다. 또 한 문장에서 영어의 대명사가 너무 여러 번 등장하여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 예를 들어 he나 she가 자꾸 등장하여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는 경우엔 그 대명사가 지칭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장을 다 읽기 쉬운 형태로 바꾸거나 윤색하진 않았고, 처음엔 생소해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겠다 싶은 문장은 그대로 옮겼습니다. 읽기 쉽게 한다는 구실아래 정확한 번역을 포기하고 윤문에 의존하는 번역서를 많이 보아왔지만, 다소 불편하더라도 외국 소설의 문체가 우리 소설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가며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인 ‘스키피오의 꿈’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 (BC 106~43)가 쓴 <국가론 (De republica)>의 맨 마지막 6편에 나오는 신화 같은 글에서 따온 것입니다. 키케로는 플라톤의 대화 형식을 도입해 <국가론>을 썼고, 그로 인해 그의 글과 플라톤의 <국가(원제는 Politeia인데 영어로는 Republic으로 번역됨)>가 혼동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키피오의 꿈>엔 두 명의 스키피오 장군, 즉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大스키피오: BC 236-184?) 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小스키피오: BC 185?-129) 가 등장하는데, 후자는 전자의 집안으로 입양되어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유력한 집안끼리 입양으로 관계를 맺어 권력과 재산을 유지, 보전하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대스키피오는 자마 전투(BC 202)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을 무찔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끝낸 것으로 유명합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에는 대스키피오가 당대는 물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 받았으나 너무 관대하여 병사들에게 필요 이상의 자유를 주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보통 스키피오라 하면 대스키피오를 뜻하는데 그는 전쟁에서 한번도 패해본 적이 없는 훌륭한 장군이었을 뿐 아니라 부하는 물론 정복지의 백성들에게까지 추앙 받았다고 합니다. 17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그림 ‘스키피오의 절제’는 점령지 사람들이 그의 관용에 감사하며 아름다운 처녀를 바쳤으나 그가 정중히 거절하고 처녀를 약혼자에게 돌려보낸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로 일컬어지는 라파엘이 그린 ‘스키피오의 꿈 (기사의 꿈)’이라는 제목의 유화는 꿈 속에서 ‘덕德’’과 ‘쾌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스키피오를 보여줍니다.
소(小)스키피오 또한 훌륭한 장군이며 정치가로,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 때 카르타고를 격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의 문인, 철학자, 역사가들을 모아 최고의 교양 집단인 스키피오 서클을 만든 인물입니다. 서양의 역사에서 스키피오라는 이름은 용기와 관용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함께 가진 뛰어난 인간을 상징합니다. 용기 없는 관용은 비굴로 흐르기 쉽고 관용 없는 용기는 잔인박행(殘忍薄行)이 되기 쉬움을 생각할 때 스키피오가 시대를 뛰어넘어 존경 받고 사랑 받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은 소스키피오가 할아버지인 대스키피오를 꿈속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그 대화의 핵심은 육체는 유한하나 영혼은 영원하다는 것, 바로 그 영혼 속에 내재하는 힘으로 지상에서 찬란한 성취를 이루어낸 후에야 천상에 들 수 있으며 그 성취란 바로 조국에 대한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스키피오의 꿈>에 나오는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 소설 속에서 소피아와 만리우스에 의해 재연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는 만리우스에게 소피아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행동하라고, 행동이야말로 철학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리우스는 소피아의 충고를 받아들여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소피아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지요. 만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판단에 따라 나라에 헌신하고, 문명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며, 그리하여 천상에 들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누가 그 꿈을 이루었고, 누가 꿈을 내세워 자신과 주위를 기만했는지 판단하는 건 독자들의 몫입니다.
야만에 무너지는 로마를 보며 정반대의 선택을 한 만리우스와 친구 펠릭스, 흑사병이 휩쓰는 아비뇽에서 신을, 진실을 지키려 한 올리비에와 세카니, 파시즘의 광기 아래서 조국과 문명을 수호한다고 나선 쥘리앵, 베르나르, 마르셀의 엇갈림. 시대를 달리하며 전개되는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야만과 문명이 대결하는 역사 속에서 과연 무엇이 역사를 지속시키고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남게 하는가를 묻는 변주곡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 모든 거창한 이름들의 싸움에서 가장 소박하되 진실한 영원성의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여기에 기술한 것은 이 소설을 이루는 큰 줄기에 불과합니다. 그 큰 줄기에는 색색의 작은 줄기들이 무수히 달려 있어 때로는 마음 졸이고 때로는 한숨 쉬며 책장을 넘기게 합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수많은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산다는 게 뭘까?” 에서 시작하여 “사랑이 뭘까?” “운명이 있는가?” “역사란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인가?” 등. 오래 잊고 있던 질문들에 잠깐씩 마음을 주고 나면 우리의 영혼 또한 소나기에 씻긴 창문처럼 맑아져 가야 할 길이 좀 더 분명하게 보일 지 모릅니다. 삶이 여행이라면 책은 배신을 모르는 길동무. 부디 즐거운 여행이 되시길 빕니다.
2006년 여름 김 흥숙
'번역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리파 페리 박사의 심리치료극장 (2011년 11월 30일) (0) | 2011.11.30 |
---|---|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2010년 7월 30일) (0) | 2010.07.30 |
청년이여, 세상을 바꾸시라! (2010년 6월 1일) (0) | 2010.05.31 |
최후의 연금술사 (0) | 2010.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