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다 보면 일본어 간판이 갈수록 많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는 일본어 간판이라 해도 우리말 발음으로 표기했는데 언제부턴가 일본어로 쓴 간판이 버젓이 걸리는 겁니다. 친일파 또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권력을 잡은 것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근대사에 무지하여 일본이 조선을 만 35년이나 잔악하게 통치했다는 걸 모르는 젊은이들은 일본을 신비롭고 멋진 나라로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물론 일본은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언제든 제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마침 제가 존경하는 황경춘 선생님이 일본의 진면목을 알리는 글을 자유칼럼에 쓰셨기에 옮겨둡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 | | | 우리의 추락을 기뻐할 이웃이 있습니다 | 2015.02.09 |
|
동북아 정세가 불안정한 요즘, 이웃 일본과 오래 계속되는 불화 관계가 걱정됩니다. 재일 교포를 겨냥한 일본 극우 세력의 격렬한 증오(憎惡) 가두시위가 수그러지지 않는 가운데 일어난 IS(이슬람 국가)의 일본인 인질 학살이 불길한 연상(聯想)을 일으켰습니다.
사고(思考)의 비약이라 비웃을 사람이 많겠지만, 일제강점기 경험이 있는 필자에게는 민족 또는 종교가 배경으로 깔린 차별행위가, 아흔이 넘는 지금도 저를 괴롭히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일반 영화관에 간 지 10년이 가까운 제가, 영화 ‘명량(鳴梁)’을 어느 시사(試寫) 극장에서 관람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민족의 대 비극이 새삼 저를 슬프게 했습니다. ‘조선정벌(朝鮮征伐)’이란 악몽을 다시금 기억나게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본 규슈(九州) 어느 시골에서 클 때, 아이들의 놀이에서 부르는 노래가사 일부에 ‘조선정벌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개선(凱旋)한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조선정벌’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 진학하여 이 ‘조선정벌’이 일본 역사 초창기에 등장하여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을 괴롭히는 사실(史實)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대 역사를 적은 책 고지키(古事記)에 의하면 일본 제14대 ’추아이(仲哀)천황이 황후와 함께 반란군 토벌을 위해 규슈에 왔다가, 바다를 건너 ‘삼한(三韓)정벌’을 하라는 신탁(神託)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침 천황이 병을 얻어 사망하자, 그의 ‘진구(神功)’ 황후가 바다를 건너 신라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것입니다. 이 ‘삼한정벌’은 우리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비문에도 남아 있다고 일본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를 시작으로 일본은 신라와 싸우는 백제를 돕기 위해 군대를 보내고, 그 후 수백 차례에 걸쳐 소위 왜구(倭寇)의 침공이 계속되였습니다. 그 사이에 ‘조선정벌’인 임진왜란이 끼어 있었습니다. 19세기에 일본이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개국을 한 후, 유신 공신의 한 사람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자 하야(下野)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제국주의 야망은 청국(淸國)과 러시아를 상대로 두 차례의 전쟁을 거쳐, 끝내는 한국을 강제 합병하였습니다. 그 뒤 3ㆍ1운동과 도쿄대지진 때의 참혹한 한국인 학살은, 일본 역사가 보여주는, 일부 일본인의 피 속에 흐르는 잔학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지, 때때로 악몽처럼 문뜩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중의 일본 군부 만행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일본 아사히(朝日)신문 기자의 무지로 여자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오보가 있었지만, 여자정신대 법령이 시행된 1943년 전에도 군 위안부와 ‘처녀 공출(處女供出)’은 있었습니다.
작년 말의 아사히 오보 사과를 계기로 일부 일본인의 아사히에 대한 공격과 함께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국 주장을 반박하는 강변이 크게 힘을 얻었습니다. 한 일본 여론조사에 의하면, 87%의 응답자가 한일관계가 최악 상태에 있다고 했고, 73%가 한국을 믿지 못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일본 보수계의 온라인‘행정조사신문’은 ‘한국 경제는 붕괴 직전에 있으며, 일본 대 은행이 대출을 회수하면 당장 망할 지경에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또 다른 우익계열 온라인 통신은 ‘한국을 부정하는 기사를 쓰면 쓸수록 주간지의 판매 부수가 증가한다.’고 했으며, 한 인터넷 매체는 한일관계 개선의 묘약은 당장에 보이지 않아, 오히려 관계 단절 등 특단 조치를 일시 쓰는 방법이 좋을지 모르겠다는 과격한 제의까지 했습니다.
일본의 제1 야당 민주당 새 대표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씨가 유흥수(柳興洙) 주일 대사를 예방한 자리에서 한일 양국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관계라 하고, 일본 여당 지도자 안에도 관계개선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매도시 도쿄(東京)의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도지사(都知事)와 만나 교류 개선 문제 등을 협의하였습니다.
양국관계 개선을 갈망하는 사람이 국내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체험을 가진 노인층이 아직 생존해 있고, 반일적 역사교육을 받은 젊은이가 많은 우리 사회가 보는 일본인 정체도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연말의 일본 총선거가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의 재집권을 가능케 했습니다만, 또 하나의 뜻있는 결과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같은 저명한 민족차별주의자가 일본정계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철저한 국수주의자고, 한인이나 중국인을 마음속으로부터 멸시하였습니다.
일본인은 대체로 선량하고 지성있는 민족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2,700년 가깝게 천황을 숭배하고, 신도주의(神道主義)로 단결한 전통을 가진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많은 정신적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아베 총리 주위에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를 비롯한 국수주의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한때 그들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의 반쪽인 인구 5천만밖에 안 되는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스포츠 등 여러 방면에서 인구 1억3천만의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는 그들의 시선이 고울 수는 없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집안 단속을 철저히 하여 다시는 임진왜란이나 명성황후 시해(弑害)같은 비극이 이땅에서 재연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
|
| 필자소개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