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조선의 언론인들(2014년 12월 8일)

divicom 2014. 12. 8. 16:24

신문마다 무수히 많은 기사가 실리고 인터넷 매체와 방송 또한 각기 쉴 틈 없이 뭔가를 보도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과 소식은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일보에 연재되는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의 '천고사설'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이, 삼일만에 실릴 때도 있고 일 주일만에 실릴 때도 있는데, 그 지치지 않는 필력 또한 감탄을 자아냅니다. 역사 속에서 오늘을 비추는 거울을 찾아내어 독자를 일깨우는 이덕일 소장께 감사합니다. 아래에 오늘 아침 한국일보에 실린 '조선의 언론인들'을 옮겨둡니다. 


[이덕일의 천고사설] 조선의 언론인들


조선의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은 양사(兩司), 대간(臺諫)으로 함께 불렸지만 둘을 구별할 때는 사헌부는 대관(臺官), 사간원은 간관(諫官)으로 불렸다. 두 기관은 모두 언론 기능이 있어서 언관(言官)이라고도 했는데 사헌부는 지금의 검찰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사간원은 언론기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수사권까지 있는 사헌부는 하관(下官)들이 먼저 출근한 후에야 상관들이 등청하지만 사간원은 “상관이든 하관이든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들어간다”며 사간원은 위계질서 개념이 약했다고 전한다. 사헌부는 수사 기능까지 있으므로 엄격해야 하지만 수사권 없이 임금에게도 할 말을 하는 순수 언론기관인 사간원은 자유로운 기풍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하면 놀랄 일이지만 언관들은 풍문탄핵권(風聞彈劾權)도 갖고 있었다. 풍문거핵(風聞擧劾)이라고도 하는데 물증 없이 떠도는 소문만 가지고도 탄핵하는 제도였다. 조선은 언관에게 탄핵당하면 사실 여부를 떠나서 무조건 사직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악용되면 생사람 여럿 잡을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은 타인을 고발했다가 무고로 밝혀지면 그 죄를 대신 받는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나라였지만 공직자들에게는 풍문탄핵도 허용한 것이었다. 탄핵대상인 고관들의 불만이 없을 수 없어서 정승들이 포진한 의정부는 태종 4년(1404) 10월 풍문탄핵제의 금지를 요청했다. 태종도 이를 받아들이고 세종도 재위 26년(1444) 6월 풍문탄핵을 이유로 대사헌(大司憲) 권맹손(權孟孫)과 사헌부 전원을 좌천시키기도 했으나 언관들은 풍문탄핵을 그치지 않았다. 풍문탄핵을 처벌할 경우 사헌부와 사간원은 함께 언론 탄압에 저항했고, 임금도 언론 탄압이란 말을 듣기 꺼리게 되면서 풍문탄핵제는 국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제도로 정착되었다.


조선 후기 미수(眉?) 허목(許穆)이 쓴 조경(趙絅)의 비문인 ‘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에는 이와 관련한 사례를 싣고 있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와 전란이 다가오면서 인조가 구언(求言)하자 사간원 사간 조경이 응지(應旨) 봉사(封事)를 올렸다. 조경은 왕자들의 전택(田宅)이 제도를 벗어났다고 비판하고,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이 무인 이대하(李大廈)에게 말(馬)을 받고 벼슬을 팔았다면서 이런 묵상(墨相)을 내쫓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탐욕스러운 재상이란 뜻의 묵상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14년’조에 “탐욕으로 관직을 부패하게 하는 자를 묵이라 한다(貪以敗官爲墨)”는 말에서 따온 용어였다. 


홍서봉은 인조반정에 가담해서 정사공신(靖社功臣)과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진 실세 정승이었지만 사간 조경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홍서봉의 아들 홍명일(洪命一)과 이대하가 상소하여 조경이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힐문(詰問ㆍ따져 묻는 것)하자고 청하자 인조가 비서실인 승정원에 명해서 힐문케 했다. 조경은 “이대하의 고향에서 말을 바친 사실을 전하는 자가 한 둘이 아니다”라면서, “우리나라가 200년 간에 간관을 이렇게 대우한 적이 없었다”고 항의했다. 


사계 박세당이 쓴 이조참판 유백증(兪伯曾)의 ‘시장(諡狀)’에 따르면 반정 1등 공신인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ㆍ1571~1648)가 가세하면서 조경은 끝내 투옥당했다. 그러자 이조참판 유백증이 간관을 투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조경 편을 들었고 인조가 “그를 감옥에 가둔 자는 대신이다”라면서 김류에게 떠넘겼다. 유백증은 “전하께서는 나라 일을 누구 집안의 일이라고 여겨 대신에게 떠넘기십니까”라면서 어탑(御榻) 가까이 다가가 인조의 옷자락을 당기려 하자 인조가 웃으면서 그날 저녁에 조경을 석방했다고 전하고 있다. 옷자락을 당긴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에게 간쟁한다는 뜻이다. 


삼국시대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기주(冀州)의 사가(士家) 10만 호를 하남(河南)으로 옮기려 했는데, 신비(辛毗)가 황충(蝗) 때문에 흉년이 들어서 불가능하다고 말렸지만 문제가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옷자락을 잡고 말렸다는 데서 나온 고사이다. 조선의 간관들이 투옥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선비들의 여론인 청의(淸議), 즉 사론(士論)이었다. 사육신 하위지가 “대간으로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한 자는 군자로부터 기롱을 받는 법인데…군자의 평론은 만대를 전한다”(세종실록 20년 4월 12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청와대의 정윤회씨 감찰문서 유출사건을 계기로 검찰과 세계일보 사이의 긴장이 높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조선시대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권력의 전횡을 막는 데는 한 몸이었다. 기레기란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로 언론인들이 신망을 잃은 것은 언론인 자신들의 문제도 있었지만 언론을 압박하거나 회유했던 정치권력의 탓도 컸고, 정치권력의 편가르기에 가세한 일부 국민들의 탓도 컸다. 평범한 국민들이 알고 싶은 것은 진실이고, 바라는 것은 정의실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