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정몽준 씨가 선출되었습니다. 지난 달 아들의 발언과 어제 부인의 발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선출된 정 후보는 선출 직후 아들 발언에 대해 다시 사과하다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래 글은 제가 정 후보를 눈물짓게 한 정 후보의 막내아들 예선씨에게 쓴 공개 편지입니다.
정예선 씨에게
아직 근신 중인가요? 오늘 오후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후 예선씨 얘기를 하며 눈물짓는 아버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요? 지난 4월 21일이지요? 예선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침몰 현장 방문을 두둔하며 “국민이 미개하니까 국가도 미개한 것 아니겠느냐”고 일갈했던 게?
당시 아버지가 서둘러 사과문을 내고 당신과 집에서 근신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태 수습에 나섰지요? 덕택에 잠잠해졌었는데 어제 어머니가 새누리당 중랑구청장 예비후보 캠프를 방문한 자리에서 막내아들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 언급하여 다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어머니는 예선씨의 발언 시기가 안 좋았고 '어린아이'이다 보니 말의 선택이 안 좋았던 것 같다고 하셨다지요?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된 후 아버지는 왜 눈물을 쏟았을까요? 감격해서일까요? 예선씨 때문에 겪었던 마음고생이 생각나서일까요? 혹시 억울해서일까요?
예선씨, 어쩜 예선씨도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야단들일까, 옳은 말 때문에 표가 줄어든다고? 역시 ‘미개한’ 국민답군,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선씨, 국민이 왜 ‘미개’해졌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아니, 모든 국민이 예선씨처럼 운이 좋진 않다는 건 알고 있나요? 재벌이자 정치권력자인 아버지를 만나서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고 대통령 주변 얘기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미개한’ 친구들 중 대부분은 예선씨 아버지의 재산과 지위를 부러워하겠지만 어떤 친구들은 예선씨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부러워할 거예요. 지금 이 나라에서 젊은 아들과 대화하는 아버지는 그야말로 희귀하거든요. 미개해서 아들에게 관심도 없는 거냐고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대개 아버지들은 아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이룬 것을 이어받거나 이루지 못한 것을 이뤄줄 계승자로 생각하니 관심이 없을 리 없지요. 아들과 대화하지 않는 건 대화법을 모르거나 식구를 부양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대화할 시간이 없어서입니다. 예선씨는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세상에는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혹시 예선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사실은 예선씨의 생각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알고 있나요? 부자든 가난뱅이든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아버지를 둔 사람은 가난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 죽어라 노력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도 하지만, 부자 아버지를 둔 사람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편하고 풍요로운 그늘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건 당연하지요. 그러니 부잣집 아들 중엔 아버지의 재산과 함께 아버지의 가치관과 시각을 물려받는 아들이 흔합니다.
문제의 글을 보니 예선씨는 또래 친구들과 다르게 우리나라 정치사회적 상황에 대해 매우 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더군요. 예선씨는 그 생각이 자기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건 ‘대화’를 통해 주입된 아버지의 의견,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며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주인이며 서울시장 후보인 아버지의 견해일 겁니다. 진정한 ‘대화’나 ‘소통’은 ‘자립한 사람들’, 즉 스스로 삶을 개척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럼 예선씨와 아버지의 대화는 뭐냐고요? 그건 아마 ‘사랑의 세뇌’일 겁니다. 세뇌당한 사람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자립하지 못합니다. 자기만의 생각을 할 수 없는 거지요.
예선씨가 ‘미개한 국민’의 증표로 삼은 장면을 나도 보았습니다. 실종자 가족들이 총리에게 뿌린 물은 겨우 몇 사람의 눈물 수준이었고 대통령에겐 그 정도의 분노 표출도 없었지요. 물속에서 죽어가는 아들딸로 인해 숨쉬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대통령 앞이라고 예의를 보이는 게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예선씨, 세월호 침몰에서 젊은 희생자가 많이 나온 이유, 알고 있지요? 승무원들이 ‘그대로 있어라’ 누차 지시하고 젊은이들이 그 말을 따르다 탈출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의 친구들은 어른들의 잘못된 지시를 믿었다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지만, 예선씨에겐 아직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어른들의 말을 곱씹어 볼 시간이 있습니다. 이번 일이 예선씨의 삶을 찾는 계기가 되길, 누구의 아바타도 아닌 정예선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어머니는 예선씨를 ‘어린아이’라고 했지만 예선씨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고등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교육을 마친 사람입니다. 예선씨를 편드는 사람들보다 비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세요. 거기 힌트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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