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칼럼에 이런 얘기 말고 가을 바람에 관한 얘기를 쓸 수 있는 시절은 영영 오지 않는 건지... 답답한 가슴을 안고,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39년에 발표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다시 꺼내 읽습니다. 역사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동반자'와 '도움'
말은 소통의 수단, 교양의 척도, 사회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생겨나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생물이기도 합니다.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우리 사회가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건 당연합니다.
저는 본디 ‘자유’를 좋아했으나 이 말이 이분법적 사고에 사로잡힌 사람들 입속의 사탕이 된 후에는 쓰지 않고, ‘미래’도 좋아했지만 ‘과거족’(정신은 과거에 두고 몸만 현재에 있는 사람들)의 표어가 되었으니 잊으려 합니다. 요즘은 대통령 때문에 두 개의 낱말을 놓고 고민중입니다. 지난 월요일엔 ‘도움’이라는 단어에 상처를 내시고 목요일엔 대기업 총수들을 ‘국정의 동반자’라 부르셨거든요.
‘동반자’는 ‘짝이 되어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나 집단’ 또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국민은 대통령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지만, 사적 이익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재벌 총수들은 ‘국정의 동반자’가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도움’은 ‘어떤 일이 잘되도록 거들거나 보탬을 주는 일’로, 본래 금전적 보상을 구하지 않고 남의 일을 거들거나 수고를 보태는 걸 뜻했지만,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직업적으로 ‘도움’을 주는 ‘도우미’도 등장했습니다.
제힘만으로 살기 어려운 세상이니 ‘도움’과 ‘도우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통령이 그 뜻을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직원들을 시켜 당신에게 유리하고 다른 후보에게 불리한 댓글을 단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고 말씀했다고 하니까요.
국정원은 2011년 말부터 약 1년 동안 ‘외부 조력자들’에게 월 300만원씩을 지급하며 정부 여당을 지지하고 야당을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게 했다고 합니다. 검찰의 주장대로라면 네 팀이 한 달에 6000건이 넘는 글을 게시한 셈이니 여당 후보에게 아주 대대적인 ‘도움’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을 받아 당선된 분이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니요?
‘조력자’는 우리말로 ‘도우미’입니다. 후보의 이름이 적힌 띠를 두르고 그 후보에게 표를 달라고 외치는 선거운동원이 ‘도우미’이듯, 보이지 않는 곳의 컴퓨터 앞에 앉아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인터넷 댓글을 다는 사람도 도우미입니다. 띠 두른 선거운동원들은 일정 지역 유권자들을 상대로 지지를 호소하지만, 컴퓨터 앞의 ‘조력자’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지원 노력을 펼치니 더 광범위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은 최고 권력기관이라 할 청와대에서 근 20년을 살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너무 오래 높은 자리에 머물다 보니 남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은 ‘충성’이지 ‘도움’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지요.
세계에는 7000개 안팎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각기 다른 언어로 소통할 때는 통역관의 ‘도움’을 받고 불통이나 오해가 생기면 그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한 민족이 하나의 모국어로 대화하면서 단어마다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면 국민 간의 소통은 불가능할 겁니다.
이제부터 높은 분들이 국민을 상대로 얘기할 때는 ‘내가 말하는 ‘자유’는 이런 뜻, 내가 생각하는 ‘도움’은 이런 것’이라고 설명한 다음 시작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단어를 사용하기 전에 보통사람들이 그 단어에 부여하는 의미를 알아보고 사용하면 국민과의 소통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힘없는 국민들처럼, 저는 가깝고 먼 ‘동반자’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는 잃었지만 ‘동반자’와 ‘도움’까지 잃고 싶진 않습니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Schlechte Zeit fur Lyrik)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얼굴은 잘 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 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우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 소작인의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 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위 시의 '엉터리 화가'는 히틀러를 뜻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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