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개봉한 영화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는 북미에서만 5억 달러,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소위 슈퍼히어로 영화인 “배트맨 (Batman)” 시리즈의 하나로 전작들의 인기 덕을 보기도 했지만, 악역을 맡았던 배우 히스 레저 (Heath Ledger)의 갑작스런 사망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호주 출신인 레저는 영화 촬영이 종료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년 1월 약물중독으로 숨졌습니다.
레저의 사망 소식에 당황한 제작사 워너브라더스는 그가 죽고 9일째 되는 날 영화 홍보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합니다. 처음엔 레저에 관한 얘기를 피하고 배트맨과 다른 악당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으나 거듭된 논의와 레저 가족과의 협의를 거쳐 레저 중심의 홍보로 방침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요란하게 화장한 ‘악당’ 레저의 얼굴은 영화 홍보 포스터와 예고편은 물론 장난감, 티셔츠, 도시락 등 캐릭터 상품의 주인공이 되어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제게는 썩 아름답게 비치지 않았습니다. 겨우 29세에 결코 잊지 못할 명연기를 남기고 떠난 배우의 죽음을 마케팅에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레저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도 “다크 나이트”의 역할에 너무도 깊이 빠져 촬영이 끝난 후까지도 그 역할에서 헤어나지 못한 데 기인했으니 말입니다. 그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와 탄탄한 작품성 덕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겐 그것이 자본주의의 무례와 잔인함의 증거로 보였습니다.
다시 레저를 생각하는 건 최근 몇 달 동안 우리 출판계가 펼치고 있는 ‘사자(死者) 마케팅’ 때문입니다. 지난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87세로 선종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1, 2” 개정판과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라는 책의 증보판이 나왔고, 3월 20일에는 “바보 별님: 동화작가 정채봉이 쓴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가 출간되었습니다. 원래 출판 준비 중이던 책들이 우연히 추기경 선종 후에 출간된 건지, 선종에 맞추어 서둘러 출간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저로선 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신 분을 기리기 위한 사업이라고 해도 49재 정도는 지내놓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3년 상(喪)은 아니어도 아직은 슬픔에 잠긴 사람들이 충분히 울게 두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5월 9일엔 번역가이며 수필가인 서강대 영문과의 장영희 교수가 별세했습니다. 87세도 아니고 57세, 노환도 아니고 평생 소아마비로, 또 지난 8년간은 유방암, 척추암, 간암으로 고통 받다 결국 떠난 겁니다. 병상에서 교정을 보았다는 마지막 저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 5월 13일에 출간된 건 그렇다 쳐도, 오래전에 고인이 번역 출간했던 책들의 광고가 연일 신문 지상을 장식하는 건 아픈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장영희 교수의 뛰어난 번역으로 읽는 베스트셀러의 감동!”이라는 문구도 거슬립니다.
3월 22일에 사망한 화가 김점선 씨와 장 교수의 이름을 함께 넣은 광고를 신문에 실은 출판사도 있습니다. 두 분이 함께 펴냈던 두 권의 책 제목과 표지를 핑크색 바탕 광고에 싣고, 눈에 띄는 검은 글씨로 “故 김점선·장영희 선생님 두 분께서 전해주신 사랑과 축복의 메시지로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습니다.”라고 써 넣은 통단광고. 아무리 찾아도 출판사 이름이 없는 건 출판사 스스로도 그런 광고를 하는 게 쑥스러워서였을까요?
김 추기경과 장 교수 책의 광고가 뜸해지나 했더니 요즘은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책 광고가 자주 보입니다. 노 대통령이 서거한 게 5월 23일이니 아직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벌써 여러 권의 책이 나왔습니다. “이런 바보 또 없습니다 아! 노무현”은 6월 11일, “바보 노무현”은 6월 14일, “똑똑한 바보 대통령 노무현”은 6월 18일.
예전에 나왔던 책들도 다시 출간되고 있습니다. 5월 29일에 나온 “노무현과 함께 만든 대한민국”은 2007년 출간된 “있는 그대로, 대한민국”의 개정판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바보 -- 나는 노무현식 바보가 좋다”는 6월 15일에 2판이 나왔고, 작년 7월에 나온 “대통령님 나와주세요”도 한창 광고 중입니다. 개중엔 유족의 동의를 받아 출간된 것도 있고, “이 책의 인세 전액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사업에 사용될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도 있습니다.
제일 민망한 건 40여년이 되었다는 인문서적 출판사 “ㅁ”사의 광고입니다. 6월 5일자 모 신문에 실린 “유러피언 드림”이라는 책의 광고는 한 면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큽니다. 노란 글씨로 쓰인 제목 위에 검은 글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 직전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이라고 쓰여 있고, 제목 아래엔 “‘유러피언 드림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비전이다.’ 퇴임 후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권했던 책”이라고 쓴 작고 검은 글씨들이 보입니다.
출판사들과 저자들 중엔 진실로 망자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서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책을 낸 경우도 있고, 다분히 장삿속으로 서둘러 책을 찍어내거나 고인의 이름을 들먹이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작년에 발행된 책의 수가 2007년에 비해 19.6퍼센트나 줄었다니 출판사들이 이익 추구를 위해 ‘사자 마케팅을 벌인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화랑가에선 ‘사자 마케팅’과 유사한 행태가 이미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화가가 연로하거나 고치기 힘든 병에 걸리거나 사망하면 그의 그림 값이 올라가곤 하니까요.
어쩌면 출판사들이 벌이는 ‘사자 마케팅’에 마음 아파하는 건 제가 아직 책과 출판사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혹은 착각 때문일지 모릅니다. 책도 많은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소비자를 매혹 혹은 현혹하여 돈을 버는 수단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은 마음의 양식” “책 속에 길이 있다” 따위의 말에 기대어, 책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책이 인간과 사회에 대해 갖는 책임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나 이제 막 세상을 떠난 분들의 이름을 ‘이용’해 돈을 버는 건 아무래도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람이니 인간에 대한 예의는 생존 여부에 관계없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책의 발행이 감소한 지난해 종교 분야 서적만은 185.5 퍼센트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에서의 삶이 그만큼 힘겨웠다는 얘기이겠지요. 이렇게 힘든 시대 책이 할 일은 지식 전달보다 위로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위로를 내걸고 쉽게 만든 책으로 돈을 번다고 해도 저자와 출판사들을 욕하진 않겠습니다. 단, 살아있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돌아가신 이를 이용하는 짓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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