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2010년이여, 어서 오시라!

divicom 2009. 12. 29. 13:15

이상하지요? 마차는 타본 적도 없는데 기다리는 건 모두 마차를 타고 올 것 같으니까요. 눈 쌓여 녹다 얼다 울퉁불퉁한 길로 2010년을 실은 마차가 덜컹거리며 오고 있습니다. 신 새벽, 자동차 소리도 아니고 냉장고 소리도 아닌 어떤 소리들은 바로 그 마차의 바퀴 소리일 겁니다.

 

제 2009년은 칼럼의 해였습니다. 2004년 3월부터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에 쓰고 있는 "Random Walk"와 2007년 3월부터 써온 자유칼럼의 "김흥숙 동행,"  2008년 8월부터 시작한 한국일보 칼럼의 "김흥숙 칼럼"에, 2009년 10월부터 출연하게 된 기독교방송(CBS FM) '시사자키'의 "송곳"까지, 네 개의 칼럼을 정기적으로 썼으니까요.  

 

나날의 삶도 온통 글감투성이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 또한 칼럼의 재료가 됩니다. 칼럼을 쓰는 사람마다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다르겠지만, 제겐 '무엇을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무릇 글이란 것이 모두 그렇지만, 특히 신문에 쓰는 칼럼은 무수한 글감 중에 '지금, 이 지면에' 쓰여져야만 하는 게 무엇인가를 골라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쓰고 싶은 글'과 '써야 할 글'이 일치할 때는 선택이 쉬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써야 할 글'에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평소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덕담이나 서정에 머물 순 없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그의 시대에 끝난 것이 아니니까요.

 

'칼럼의 해'가 가고 '다른 글'을 쓸 수 있는 해가 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건 10월에 CBS 양병삼 피디의 전화를 받았을 때입니다. '송곳'에 전화로 출연해 5분여 동안 시사칼럼을 방송해달라는 말씀에 몇 가지 이유로 반대를 했습니다. 제 전화 목소리가 너무 "비송곳적"이어서 '송곳'에 맞지 않는다는 얘기,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 라디오방송이나 텔레비전 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 이미 세 개의 칼럼을 쓰고 있으니 매주 하나씩을 더 쓰는 건 무리라는 얘기.

 

하지만 한국일보의 "김흥숙 칼럼"을 읽다가 저를 '송곳'에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양 피디님은 그래도 쓰라고 하셨습니다. 신문기자 시절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는 분들을 설득하느라 힘들었던 일이 생각나 마침내 쓰겠노라 말할 때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올해는 칼럼을 쓸 운명이야, 네 개를 쓰는 건 힘들겠지만 이렇게 해야 칼럼의 해가 끝이 나겠지.

 

'운명'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의 존재를 믿는다는 건 사람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운명의 다른 말은 순리 혹은 자연이겠지요. 순리를 따라 살거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도 아니고 목표지향적이지도 않은 저 같은 사람들 중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네 개의 칼럼을 쓰려니 무엇보다 신문을 열심히 읽어야 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고, 무엇을 어떻게 쓰는 게 옳은지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기독교방송 양 피디님의 전화를 다시 받았습니다. 12월 24일 '송곳'이 제 마지막 '송곳'이 될 거라는 얘기였습니다.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는 것 같았습니다. 드디어 '칼럼의 해'가 가는구나. "써야 할 글의 나날"이 가고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나날"이 오겠구나!

 

12월 24일 '송곳'을 위해서는 기독교 얘기를 썼습니다. 교회 돈을 횡령하여 신도들에게 고발당한 목사님과 장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설파하신 목사님을 예로 들며, 정치 경제는 각기 맡을 사람에게 맡기고 성직자는 계명을 지키며 예수님의 사랑 실천에 앞장서시라고 썼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이브야말로 그런 얘기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방송국에 계신 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런 얘기를 하느냐며 다른 주제로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꿀 수 없다고, 꼭 다른 얘기를 하라고 하면 아예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했습니다. 양 피디님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제 마지막 방송은 12월 24일이 아닌 17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새해부터는 한국일보에 연재하던 '김흥숙 칼럼'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근 일년 반을 썼으니 그만둘 때도 되었지요. 세상에는 글 쓰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특정인의 글이 한 지면을 오래 차지하면 다른 의견의 출현을 막게 되니 신문의 필진은 자주 바뀌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건 제 마음입니다. 전에는 두 개의 칼럼을 쓰면서도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네 개를 쓰다가 두 개가 되니 아주 여유롭습니다.

 

2010년은 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했던 글들을 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칼럼으로 할 수 없었던 얘기들이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누군가를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위로'가 허영이라 해도 이런 허영쯤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께 보람 많은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2010년이여,  어서 오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