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칼럼(삶의 창)

대통령 후보 사진 (2012년 7월 28일)

divicom 2012. 7. 28. 11:00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앞의 세 줄은 한겨레에서 달아준 작은 제목입니다.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아, 이래서 여권사진 찍을 때

이를 보이며 웃지 말라 하는구나


여름 추위는 긴팔 옷으로도 이기기 어렵습니다. 버스, 지하철, 가는 곳마다 에어컨 바람이 거슬리더니 결국 감기에 걸렸습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쓰고 끙끙 앓다가 전화를 받습니다. 머지않아 베이징에서 열리는 국제도서전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도 냉방을 하겠지? 좋아하는 책들을 보러 가는 일인데도 기쁨보다 부담이 앞섭니다.


여권을 찾아보니 유효기간이 지난 지 한참입니다. 집에 있던 사진을 들고 구청에 가니 규정이 바뀌어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카메라만 보면 피하는 사람이지만 구청 옆에 있는 사진관으로 갑니다. 사진기사가 거울 옆에 붙은 새 사진 규정을 읽어본 다음 거기에 맞게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라 합니다. 


규정엔 사진의 배경은 흰색이어야 하고, 시선은 반드시 정면을 보아야 하며, 양쪽 눈썹과 귀가 확실히 보여야 하고, 이를 보이며 웃으면 안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다른 건 그렇다 해도, 이 보이며 웃는 건 왜 안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기사가 컴퓨터 화면에 막 찍은 제 얼굴을 띄워놓고 보라고 합니다. 마음에 안 들면 오늘이든 언제든 다시 찍어 주겠답니다. 땡볕 아래서 펑 젖은 무질서한 머리칼, 지친 듯 피로한 초로의 얼굴, 집에서 입고 뒹굴던 티셔츠가 연민을 자아냅니다. 여행이라고는 출장성 여행만 가는데, 그럴 때 들고 다닐 여권 사진으로는 복장이 불량이라 안 되겠다고, 며칠 후를 기약하며 사진관을 벗어납니다.


사흘 후,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다듬고 얼굴엔 분, 입술엔 연지를 바르고 사진관으로 갑니다. 거울 속엔 시간을 화장으로 숨긴 여자가 있습니다. 입을 벌려 웃으면 훨씬 유쾌하고 생기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규정이 있으니 그렇게 웃을 수는 없습니다.


신문을 펼치니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정치인들이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입을 다물면 독선적 면모가 드러날 텐데, 이 사람이 입을 다물면 사기꾼 기질이 보일 텐데, 이 사람이 입을 다물면 기회주의적 본성이 나타날 텐데… 그러나 입을 벌리고 환하게 웃고 있으니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아, 이래서 여권 사진을 찍을 때 이를 보이며 웃지 말라고 하는구나,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지금은 사진의 시대이지만 진실한 사진은 7월의 사과처럼 귀합니다. 보통 시민이 매스컴의 주인공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대개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겠네, 저 사람은 어떻겠네, 판단합니다. 그러다보니 정직한 사진보다 ‘뽀샵’을 잘해 사진 속 인물을 좋아 보이게 하는 사진이 사랑을 받습니다.


12월 대통령선거에 나오는 후보들은 여권 사진 규정에 따라 사진을 찍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메이크업이나 ‘뽀샵’은 금하고 ‘생얼’로 찍게 해야 합니다. 거짓말 잘하는 혀는 입안에 가두고 입을 다문 채, 눈썹과 귀를 완전히 드러내고, 삶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만 허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후보들의 말과 웃음에 속던 유권자들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중 제일 진실한 얼굴에게 표를 줄지 모릅니다. 그러면 거짓이 진실보다 이롭다는 풍조에 작은 금이 가고, ‘여름은 덥다’는 진실을 냉방으로 지우려는 억지 같은 것도 주춤할지 모릅니다. 그러면 저처럼 인공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의 고통이 줄어들고, 책을 만나러 가는 일이 여전히 즐거운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