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재벌의 질문 (2011년 12월 17일)

divicom 2011. 12. 17. 11:38

오늘 아침 중앙일보 인터넷판에는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1987)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남겼다는 질문지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A4용지 다섯 장 분량의 질문지는 천주교 원로 정의채(86) 몬시뇰이 가지고 있다가 내놓았다고 합니다. ‘몬시뇰’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성직자들에게 사용하는 칭호입니다.

 

정 몬시뇰(당시 가톨릭대 교수)은 1987년 10월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1988) 신부로부터 이 질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만간 이병철 회장과 만날 예정이니 답변을 준비해 달라는 말을 들었으나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되어 만남은 연기됐고, 이 회장은 다음 달 19일에 타계했다고 합니다.

 

질문지를 남기기 2년 전, 이 회장은 폐암 진단을 받았는데 암 진단 직후 일본인 저널리스트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다.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 회장의 질문은 24개.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나?”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나?” “종교가 없어도, 종교가 달라도 착한 사람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나?”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걸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다.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그렇게 흘러가던 물음은 마지막 질문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에서 멈췄다고 합니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나 이 회장이 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 더 일찍 물었어야 할 질문들,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야 할 질문들을 너무 늦게 물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 분이 이 질문들을 좀 더 일찍 묻고 그 답을 찾느라 애쓰셨다면 삼성그룹의 오늘이 지금과 좀 달랐을지 모릅니다. 

 

이 회장과 같은 재벌이든 마이너스 통장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소시민이든 죽음이 문밖을 서성일 때쯤엔 이 회장과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평생 씨름해야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자신 속의 질문을 대면하고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애쓰다보면 재벌은 될 수 없을지 모르나 죽음을 좀 더 차분하고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중앙일보는 이 기사에서 이 회장 타계 24년 만에 '본지가 단독 입수'한 이 회장의 질문지가 정 몬시뇰의 제자인 차동엽(53) 신부의 답과 함께 연말에 책이 되어 나올 거라고 합니다.  정 몬시뇰은 이 회장의 질문들은 "영혼에서 나오는 물음"이라며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회장의 질문지에 담긴 메시지를 요즘 젊은이들도 숙고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다보면 중앙일보가 이 책을 미리 홍보하고 싶어 이 기사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회장이 중앙일보의 주인이었으며 지금도 삼성과 중앙일보는 형제와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본지가 단독' 운운 하는 것도 좀 이상합니다. 

 

의도야 어쨌든, 또 질문한 사람이 재벌이든 아니든 이 질문들은 젊은이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사람이 잘 살기 위해, 또 잘 죽기 위해 물어야 할 질문들입니다. 사는데 바빠 이 질문들을 잊고 사셨던 분들, 혹은 머리 아프다는 이유로 미뤄두셨던 분들 모두 더는 미루지 마시고 이 질문들과 대면하고 씨름하시기 바랍니다. 이 질문들과 씨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이 세상도 지금과는 좀 다른 곳이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