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당신은 왜 의사가 되었나요? (2026년 9월 28일)

divicom 2026. 9. 27. 23:32

명절 연휴든 주말이든 질병과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추석 연휴라고 수많은 사람이 지상과 하늘의 길을 바쁘게

오갈 때도 꼼짝 못 하고 병상의 포로로 지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병원 앞을 지나갈 때는 늘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저들을 위로하소서, 저들을 돕는 사람들을 도우소서...

 

의사(醫師), 약사(藥師), 간호사(看護師)의 '사'가 '스승 사'가

된 건 그 직업인들이 생과 사의 접경지역에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 싸우고 헌신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에서 사람을 살리고 싶어 보건 의료인이 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사람을 살리고 싶어 의사가 되는 게

아니라면 왜 의사가 되는 걸까요?

 

추석 연휴 직전 인터넷 바다에서 우연히 만난 의사 유덕종 씨,

그분이 멀리 아프리카 아디스아바바에서 보낸 편지를 읽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한국의 동료들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덕종의 아디스 레터]

나는 왜 의사가 되었나, 왜 아프리카에 와 있나

고국에서 들려오는 의료계 소식이 마음을 짓누른다. 의대 정원 확대를

넘어 필수의료 체계의 구조 개편과 지방 의료 인프라 확충까지, 얽히고

설킨 난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왜 의사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한국을 떠나 먼 아프리카

땅에 와 있는가?’

 

아버지는 지방 보건소 공무원으로 일하셨다. 의사의 삶을 긍정적으로

보셨고, 어린 내게 “커서 의사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여읜 뒤, 효도를 못 했다는 자책감은 ‘아버지 소원만큼은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다짐으로  굳어졌다. 젊은 나이에 결핵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질병에 대해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할머니까지 연이어 떠나시면서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어차피 의사가 될 거라면, 슈바이처처럼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당시에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의예과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캠퍼스에서

성경 공부를 하며 크리스천이 되었다. 공허했던 마음에 사랑이 채워졌고,

의사로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겠다는 꿈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의대 6년,

수련의 4년, 군의관 3년을 거치면서도 그 마음은 식지 않았다.

 

그 시절 아프리카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봉사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본과 시절 말라위에서 정부파견의로 일하던 분을 만났고, 대한민국

정부파견의 제도를 알게 되었다. 기회를 엿보던 중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

(KOICA)이 창설되었고, 아프리카로 파견할 정부파견의 모집 공고가 떴다.

영어권 국가 중 내과의사가 갈 수 있는 나미비아, 스와질란드(현 에스와티니),

우간다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우간다를 선택했다. 독재자 이디 아민이나

이스라엘 특공대의 엔테베 기습작전으로만 알려진 나라였다.

 

1992년 내가 도착했을 때 우간다는 거듭된 내전의 상흔으로 황폐해져 있었다.

엔테베 국제공항 천장은 시커멓게 거미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복도에는 부서진

의자들이 굴러다녔다. 더 심각한 것은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유병률이었다.

수도 캄팔라의 산전 클리닉 조사 결과 HIV 양성률이 34%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1992년부터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유덕종 /유덕종 제공

 

국립최종병원 내과 병동에서 근무하며 만난 환자의 70~80%가 HIV 양성

반응을 보였다. 열대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나라 국립병원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다. 기본적인 항생제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환자 보호자가 약을

사 오면 투여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손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의사로

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고, 첫 1년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병원으로 끝없이

몰려드는 환자들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케레레 의대 학생들과 수련의들

역시 마음에 걸렸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이들을 잘 가르친다면 언젠가 환자를

제대로 진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나를 붙들었다.

 

우간다와 에스와티니,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어느덧 아프리카에서 35년

세월이 흘렀다. 모진 일도 많았지만, 견뎌낸 만큼 보람도 컸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에 목숨을 구한 이들이 있었고, 키워낸 제자들도 든든한 의료진으로

자리를 잡았다. 십수 년 전 에스와티니 버스터미널에 처음 내렸을 때, 누군가

반갑게 인사해 놀란 적이 있다. 마케레레 의대를 졸업한 옛 제자였다.

 

한국을 떠날 때 주변 반응은 엇갈렸다. “정말 훌륭한 일을 한다”며 존경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고, “한국에도 봉사할 곳이 많은데 아프리카라니 미친 짓”이라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한국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많았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아프리카의 현실은 훨씬 절박하다.

아프리카라고 해서 모두 같지 않고, 우간다나 에티오피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처지는 아니다. 부자들은 치료받을 다른 길이 있지만, 가난한 이들에게는

국립병원이 유일한 마지막 보루다. 지난 세월, 나는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고된 시간보다 감사한 순간이 훨씬 많았다.

 

한국의 의대 지망생과 현업에 있는 후배 의사들에게 조용히 묻고 싶다. 여러분은

왜 의사가 되고자 하는가?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필수의료 체계는 왜 무너지고

있는가?

 

☞의사 유덕종

1992년 ‘정부 파견 의사’ 1기로 선발돼 우간다로 갔다. 계약을 연장하며

아프리카에 남았고 지금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길러낸 의사만 4000명. 아산상, JW성천상 등을 받았다.

현지에선 아디스아바바를 줄여 아디스라 부르는데 ‘아디스 레터’는 그곳에서

띄우는 편지다.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6/09/21/4XRHGZTFCJHTRP4CK7MU3KPP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