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294: 9월 라일락(2026년 9월 17일)

divicom 2026. 9. 17. 18:30

제 오랜 친구 중 하나는 귓병입니다. 젊은 시절 중이염으로

고생한 후 좀 무리한다 싶으면 잊지 않고 찾아와 경종을 

울렸습니다. '살 만하다고 까불지 마' 하는 것 같았습니다.

 

법적으로 노인이 된 후엔 몸의 말을 경청하며 산 덕에 귓병을

잊고 살았는데 며칠 전 다시 찾아왔습니다. 아버지의 기일을

앞두고 슬픔이 깊어진 데다 맡은 일이 있어 신경을 썼더니

'정신 차리라!'고 온 것이지요.

 

귓병 덕에 아침 산책을 며칠 거르고 나가니 산책로 주변의

풀들이 밑둥만 남고 텁텁한 흙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하천 바로 옆 비탈의 풀들은 그냥 있는데 산책로 옆 평평한

곳의 풀들만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풀도 사람처럼 어디에

뿌리를 내리는가가 중요한가 봅니다.

 

아침 산책길에 영롱하던 나팔꽃들이 생각났습니다. 길 옆

풀들 사이에 피었던 잉크빛 꽃들을 보면 왜 나팔꽃의

영어 이름이 'Morning Glory'인지 알 것 같았습나다.

그런데 그 '아침의 영광'들도 모두 예초기의 날에 잘려

사라진 겁니다. 나았던 귓병이 도지는 듯했습니다.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왜 조금 기다릴 수

없었을까? 날씨가 조금만 추워지면 나팔꽃을 비롯한 천변의

꽃들이 스스로 시들어 피지 못하고 이미 바래기 시작한

풀들도 스스로 생기를 잃을 텐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을까? 노인의 죽음이 젊은이의 죽음보다 자연스럽지

않은가...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올 때는 늘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가던 시절처럼 행복했는데, 그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우울한 오전이 끝나갈 때 베란다에 빨래를 널러 나가니

라일락이 피어 있었습니다. 5월에 피지 못한 라일락이

9월에 피다니!

 

라일락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다음날이 아버지 기일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후에도 제가

힘들어 할 때면 가끔 찾아와 주시던 아버지가 라일락을

피워 저를 위로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처럼 생각한다는 건 먼 곳을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생生과 사死가 함께 있음을 아는 것. 

풀이 시들어 누우면 베기도 정리하기도 어려우니 아직

꼿꼿이 서 있을 때 베었겠구나... 문득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닦고 라일락 향기를 맡았습니다. 5월 향기는 5월

햇살처럼 노골적이지만, 9월 향기는 아버지의 미소처럼

은은했습니다. 귀가 간질거렸지만 아프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