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쯤 고양이 한 마리가 제 책상 위
스탠드 아래에 자리 잡았습니다.
부드러운 흰 헝겊 피부, 검은 머리에 붙인
분홍 리본이 어여쁘지만 큰 눈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제 게으름을 감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 첫 달이 끝나가는 오늘에야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엘리엇으로 지었습니다.
미국인으로 태어나 영국인으로 죽은 T.S. 엘리엇의 시
'고양이 이름 짓기 (The Naming of Cats)' 때문입니다.
영문까지 쓰려니 너무 길어 대충 번역해 올려둡니다.
고양이 이름 짓기
고양이 이름 짓기는 어려운 일이야
쉬는 날 재미로 할 일이 아니야
이렇게 말하면 내가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고양이에겐 세 개의 이름이 필요해
우선 가족들이 매일 부를 이름이지
피터, 아우구스투스, 알론조, 제임스,
빅터, 조나단, 조지, 빌 베일리 등
다 괜찮은 이름들이지
조금 더 다정한 느낌을 주는 그럴싸한 이름도 있어
신사용도 있고 숙녀용도 있지
플라토, 아드메투스, 일렉트라, 데메테르 등
다 매일 부르기에 괜찮은 이름들이야
그렇지만 고양이에겐 좀 특별한 이름이 필요해
독특하고 품위 있는 이름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고양이가 꼬리를 수직으로
세우고 구레나룻을 펼치고 자부심을 드러내겠어?
난 이런 용도에 맞는 이름을 필요한 만큼 줄 수 있어
멍크스트랩, 쿠악소, 코리코팻,
봄발루리나, 젤리로금 등
이런 이름들은 각기 한 마리의 고양이에게만 줄 수 있지.
그런데 이 이름들을 뛰어넘는 또 한 가지 이름이 있는데
그건 결코 추측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 연구한다고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
고양이 자신만이 알되 발설 하지 않을 테니까
깊은 생각에 빠진 고양이가 있다면
다 같은 이유로 그러는 거야
그 고양이는 한 가지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라고, 한 가지 생각, 바로
자기 이름 생각이라고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심오하고도 웅숭깊은 뛰어난 이름
'오늘의 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벽한 인간을 위한 자연의 시도 (2023년 3월 6일) (1) | 2023.03.06 |
---|---|
2월이 28일인 이유 (2023년 2월 14일) (1) | 2023.02.14 |
<월든>이 하는 말 (2022년 9월 15일) (0) | 2022.09.15 |
텅 빈 캔버스 (2022년 8월 22일) (0) | 2022.08.22 |
그림자 경주 (2022년 8월 7일) (0) | 2022.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