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신문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의
박주용 교수가 쓴 글입니다. '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⑪인류는
어디로 갈 것인가…불편해하지 마라, 우린 아직 선택할 수 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신문의 한 면을 차지하는 긴 글이라 많이 줄여 옮겨둡니다.
맨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박 교수가 소개한 영화와
책 중에서도 저는 '신들의 재판'과 '가타카'를 특히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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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뜻하는 ‘사이언스(science)’의 어원은 라틴어의 scientia이고, 이것은 ‘알다’를
뜻하는 scire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과학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의 총체를 말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요즈음 자주 이야기되고 있는 ‘팩트(fact)’를 아는 것이 바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분명히 있었던 일’을 뜻하는 우리말인 ‘사실’이나 ‘진상’ 대신 fact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 심리적인 거리감으로 인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이 더 명확해지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팩트’를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삶에 무슨 영향을 주는가 하는 질문이 다시 생겨나기 때문이다. 팩트란 이미 존재하는 것, 이미 벌어진 사실을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해서, 또는 모른다고 해서 바뀔 수가 없다. 즉 팩트 또는 그것이 기술하고 있는 과거의 일들 자체는 우리의 인지나 행동과 상관없이 변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팩트를 올바로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에게 인생을 맡겨야 한다면 여러분은 누구를 택하겠는가? 안다는 것은 사람의 판단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서 과학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다리라고 볼 수 있다.
미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탐구하는 데 있어 우리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하나로는 영국의 자연사학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1809~1882)을 꼽을 수 있다. 다윈은 동시대를 살던 앨프리드 월리스(Alfred Wallace·1823~1913)와 함께 창시한 진화론(the theory of evolution)을 통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공통의 조상에서 나왔다고 주장했고, 원분야였던 자연사학·자연과학을 넘어 사회학과 정치학의 영역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공로로 아이작 뉴턴, 찰스 디킨스 같은 세계적 학자·문호들과 함께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셔져 있다.
다윈 진화론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매우 간단하다.
자손을 낳기 위해서는 당연히 죽지 않고 생존을 해야 하는데, 유한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는 강력하고 ‘적합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의 원칙에 의하여 세대가 지날수록 그 성질과 특징을 물려받은 개체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적합한 자는 선택을 받아 그 형질을 널리 퍼뜨리고 적합하지 않은 자는 소멸하는 이것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고 한다.
그런데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왔다는 것은 사뭇 흥미로운 일이다. 인류의 과거를 들여다볼 때 다윈 진화론의 논리적 귀결인 ‘모든 생물은 공통의 조상이 있다’는 것이 그러한 불편함이 터져나오는 데 큰 도화선이 되었다. 진화론은 인간은 우월하며 고귀하므로 완전히 특별한 존재라는 종교적인 신념의 뒤통수를 치는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의 모습을 따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성서적 비유가 아닌 활자 그대로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진화론과 갈등했던 역사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1925년 미국 테네시주에서 있었던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이다. 존 T 스코프스(John T. Scopes: 1900~1970)라는 교사가 공립학교에서는 인간의 진화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법령을
무시했다는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 재판을 극화한 1960년의 <신들의 법정(inherit the wind)>이라는 영화에는 ‘인간들의 조상은 원숭이’라고 하는 것 같은 진화론의 주장에 대해 (그래서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이라고도 한다) 적대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물론 진화론은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한 적이 없고,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이처럼 진화론의 틀을 통해 과거를 바라볼 때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두고 사람들이 불편해했던 것처럼, 진화론의 틀을 통해 미래를 바라볼 때는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두고 불편해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적자생존’ ‘자연선택’과 같은
진화의 원리로부터 자비 없는 무한경쟁을 통해 강한 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약탈하게 된다는 ‘약육강식’의 이미지는 수많은 SF(science fiction)에서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밑그림이 되어왔다. 대표적인 디스토피안 SF 소설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1894~1963)의 1932년작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보면 진화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적자생존의 공식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예 인간을 공장에서
만들어내면서 우월한 인류를 어릴 적부터 판별해낸 뒤에 인생을 즐길 갖은 권리를 주고 나머지는 힘든 일을 시키며 세뇌를 통해 이 ‘멋진’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한,
발전이 멈춰버린 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헉슬리 이후 90년이나 지나는 동안 이러한 어두운 디스토피아는 피할 방법이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독자에겐 1997년에 발표된 <가타카(GATTACA)>라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멋진 신세계>의 1932년과 <가타카>의 1997년 사이에는 진화론이
미시적 세포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해주는 유전자와 DNA의 발견이라는 사건이 있었으므로 그 전후를 비교하는 것은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불행히도 DNA는 <멋진 신세계>라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막아주는 희망의 무기가 아니라 그것의 설계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가타카>이다.
<가타카>는 물론 픽션으로서 과학적 사실성을 완벽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알던 유전학자 한 분도, 저명한 학술저널 네이처 지네틱스에서도 <가타카>는 충분히 현실성 있는 내용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영화이다.
(중략)
동물계에 대한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과 같은 진화론의 극단적인 예측과 달리 인간의 진화에는 다른 요인들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다윈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탐구의 결과가 <인간의 유래와 성(性)에 관련된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이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비글호 여행기>(1839)와 <종의 기원에 관하여>(1859)에 이은 다윈 진화론의 세 번째 저서로 알려진 이 책에서 다윈은 인간의 진화가 다른 동물과 비슷한 점, 다른 점들을 나열하면서 인간이 생물학적으로는 다른 생물들과 공통의 조상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무차별적인 적자생존과 무한경쟁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공동체의 윤리 같은 인간 특유의 현상을 통해 약자를 배려하고 생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화해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좋은 미래에 대한 끝없는 기대감과 남다른 동정심·윤리·지능을 갖고 디스토피아로 우리를 끌고 가려 하는 자연환경의 진화적 압박(evolutionary pressure)에 대응할 힘이 있다. 우리는 디스토피안 미래에 대한 걱정에 빠지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무엇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생각하며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하략)
▶박주용 교수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103112127005&code=610100#csidxefeeeb6d9c6b09780ebbc63cd91b2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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