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분 교수'와 젊은이의 용기(2015년 7월 17일)

divicom 2015. 7. 17. 07:42

다시 제헌절입니다. 태극기를 걸며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생각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된 데는 소위 전문가 집단의 타락이 큰 몫을 했겠지요. 정치인, 법조인, 의사, 교수, 언론인, 작가... 마침 교수들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는 한때 선망 받는 직업이었지만 이젠 그냥 '안정된' 직업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스승은커녕 사람 노릇을 포기한 교수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표절하고, 제자가 쓴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발표하고, 제자에게 줘야 할 연구비를 착복하고, 제자를 성추행내지 폭행하는 교수들이 끊임없이 뉴스의 주인공이 됩니다.

 

지난 14일 성남 중원결찰서가 구속한 강남대학의 장 모 교수는 20133월부터 올해 5월까지 29세의 제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인분까지 먹였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심각한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제자를 야구방망이로 폭행하고 인분을 먹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다른 제자들을 시켜 자신 대신 폭행하라고 시키기까지 했다니 돌아도 단단히 돈 사람입니다. 이 교수는 디자인 분야의 권위자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는데, 도대체 어떤 디자인을 했으며 무슨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장 교수가 인터넷을 달구는 동안 강석진 전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는 제자 '성추행' 파문의 주인공으로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1심에서 실형을 받았던 그는 어제 오후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여학생들을 성추행한 것은 사실이나 상습적으로 하진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강 씨는 2008년 초부터 작년 728일까지 서울대 수리과학부 여학생 등 9명을 11차례에 걸쳐 강제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지난 514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6,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160시간 이수, 신상공개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다음 공판은 827일 오후 4시에 열린다니 지켜봐야겠습니다.

 

지난 621일에는 십대의 여제자를 성폭행한 대학교수 신 모 씨가 항소심에서 원심과 같은 징역 3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신 씨는 격투기 관련 학과 부교수로 있던 20132학기 자신의 교양수업을 수강한 다른 과 여학생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봐준다며 불렀으며, 이듬해 1월 이 여학생을 다른 사람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데려가 함께 술을 마시고 만취한 여학생을 호텔에 데려가 힘으로 제압하여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1심 재판관은 신 씨의 혐의를 사실로 인정하고 올바른 교육의 책임이 있으며 체육계의 선배로서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그런 지위를 망각한 채 제자인 피해자를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진지하게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어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36개월을 선고했는데, 3년 반의 징역형이 죄질이 불량한 강간범에게 합당한 것인지, 피해자에게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준 사람에게 준 벌로서는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지 의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파렴치한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요?

 

위에 열거한 가해자들은 직업만 교수일 뿐 파렴치한들입니다. 교수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순간부터 그들을 교수로 대우하면 안 됩니다. 피해자들의 실수는, 스승은 물론이고 인간 노릇조차 포기한 파렴치한들을 교수로 대우한 것입니다. 교수로 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계속 교수로 대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인분 교수에게 상습적으로 폭행당한 제자의 경우에는, 디자인계 유력인사인 그 교수에게 밉보이면 자신이 교수가 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그 이유였다고 합니다. 전 서울대 교수 강 씨의 제자들도 비슷한 두려움 때문에 오랜 시간 강 씨의 성추행을 묵인해왔을 겁니다. 신 모 씨의 제자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싶은 열망과 교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성폭행의 피해자가 되었겠지요.

 

몇 해 전 제 젊은 친구가 모 대학원에 다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의 선배 중에 교수에게 성폭행인지 추행인지를 당한 사람이 있었는데, 같은 과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사실을 알면서도 피해자의 편을 들거나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제를 제기해도 교수가 벌을 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데다 학교 측이 교수를 싸고도는 일이 많으니까요 교수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자신을 고발했던 학생에게 불이익을 줄 거라는 우려가 학생들로 하여금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교수는 아직까지 뉴스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으니 아직 권위 있는 교수로 재직 중일 겁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두려움의 피해자가 됩니다. 아니면 아니라고, 싫으면 싫다고 해야 합니다. 교수 아니라 명예교수라도, 아무리 높은 권위자라도, 사람답지 않으면 내쳐야 합니다비굴한 젊은이는 나쁜 어른들을 더 나쁘게 만들고 끝내 비굴한 노인이 됩니다. 파렴치한 어른이 많은 나라에서 젊은이들만은 비굴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 너무 큰 욕심일까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떳떳하게 살다 가신 선배들이 떠오릅니다. 

이육사(1904-1944)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 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두렴


(이육사본명 원록(祿) 또는 원삼(), 개명은 활(). 경북 안동() 출생.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 입학. 1927년 귀국.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고,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음.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 계속.1943년 중국에 갔다가 귀국하여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 1년 뒤 해방.: 두산백과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