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김영삼 전 대통령께 (2009년 4월 22일)

divicom 2009. 10. 31. 11:19

1980년대 식사 자리에서 한번 뵙고 처음이니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겉모습만 조금 변하셨을 뿐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2주 전이던가요? 거제도 생가 옆 광장에서 자신을 기념하는 ‘기록전시관’ 기공식에 참석하시어 말씀하셨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여러 행태로 볼 때 머지않은 장래에 형무소에 가게 될 것이라 믿는 국민이 전부”라고. 또 남북정상회담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에게 ‘6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돈을 주고 이뤄냈으며 노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실소를 자아내는 ‘증언’ -

 

지난주 월요일부터는 SBS라디오 ‘한국현대사 증언’에 출연하여 ‘집권비망록’을 들려주고 계신데 자기합리화와 책임 전가가 실소를 자아낸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IMF 외환위기 사태를 언급하시며 경제가 나빠지기 시작할 때 “나는 상당히 걱정을 했는데, 경제부총리나 경제특보 같은 사람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고 하신 것, IMF 사태를 초래한 책임의 ‘최소한 65%’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하신 게 재미있습니다.

 

SBS가 왜 하필 지금 ‘집권비망록’을 방송하는지, 거제시가 왜 시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영삼 ‘기록전시관’ 건립을 하는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정치란 비정치적인 사람이 이해하기엔 너무도 복잡한 수학이니까요. 빚은 있지만 비리 정치인과 경제인들 덕에 통이 커진 제가 보기에 건립비용 34억 원은 큰돈이 아닙니다. 김정일에게 주었다는 6억 달러도 ‘천문학적’ 액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쓰려면 둘째 아드님 현철 씨를 구속되게 만든 1997년 한보사태 때의 부정대출액처럼 수조 원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이미 아실지 모르지만 지금 국민의 분노와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노 전 대통령 가족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부정은 그 이전 대통령들과 그 가족들이 저질렀던 비리까지 상기시키며 냉소와 자포자기를 부추깁니다. 이런 판국에 그런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신 분이 자꾸 추임새를 넣으시니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나도 아들 단속을 제대로 못했었는데 남의 일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셨으면 적잖은 국민의 공감, 나아가서 존경까지 사셨을지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국민은 아직 ‘문민정부’가 장기적 비전 없이 취했던 조처들의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세계화’ 구호가 불붙인 영어열풍은 영어교육을 15조원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시켰지만 우리의 토플 성적은 세계 최하위권이고, 1996년 서둘러 가입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한국은 좋지 않은 일에서 늘 선두그룹입니다.

 

여기저기 보도된 것만 보아도 여성 자살률 1위, 전체 자살률 3위, 출산율 꼴찌, 청소년 흡연율과 자살률 1위, 수면 시간 짧기로 1위, 근로시간 길기로 1위,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공사회복지지출 꼴찌, 결혼건수 대비 이혼율 3위, 자동차 사고율 4위, 고령인구비율 8위, 빈곤율(소득이 중위 소득의 절반에 못 미치는 상대적 빈곤층의 비율) 6위... 최근엔 사회보장의 척도인 ‘사회임금’ 수준에서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스웨덴의 사회임금 비율은 48.5 퍼센트, OECD 평균은 31.9 퍼센트인데 우리나라 비율은 7.9퍼센트밖에 안 되니 국민이 구조조정에 격렬하게 대응하는 거라고 합니다.

 

-소리 없이 말하는 법-

 

아무리 젊어보이셔도 여든이 넘으셨습니다. 연세 높은 분들이 존경받는 첫 번째 조건은 떠오르는 생각을 다 발설하지 않는 거라고 합니다. 청와대 시절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몸은 빌릴 수 없다”며 조깅을 열심히 하셨지만 이제 연세도 있으시니 책을 좀 뒤적여 보시면 어떨까요? 마침 내일은 ‘책의 날’입니다. 소리 없이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활자들을 통해 다변을 능가하는 침묵을 터득하시고 존경받으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