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날이 견디기 힘드니 자꾸 옛사람들 생각이 납니다. 제가 젊지 않은 탓이 크겠지요. 가끔 40여 년 전에 뵈었던 김옥길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문창극 총리 후보처럼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기독교도들을 볼 때 특히 그렇습니다. 선생님이 오늘 서울에 계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래에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을 옮겨둡니다.
* * *
대답해 주소서!
선생님, 1990년 8월에 떠나셨으니 곧 24년이 됩니다.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신 사이 이 나라는 아주 많이 변했습니다. 정부는 국민소득이 늘어 선진국이 되었다고 자랑하지만, 소음과 비탄과 분노가 번지르르한 통계를 압도합니다. 벼락 맞을 짓을 하는 자들일수록 소리 높여 ‘하나님’을 부르고 신경정신과는 성형외과 못지않게 성업 중입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 아이의 입학식이 떠오릅니다. 가난한 집 딸이었던 아이는 등록금이 제일 적다는 대학교의 입학시험을 쳤지만 떨어졌지요. 집에서 설거지를 하며 책을 보다가 이듬해 선생님이 계시던 대학에 입학했지요. 머리를 단장하고 새 옷을 입고 와 방싯거리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그 아인 일 년 동안 멋대로 자란 머리에 헌 옷을 입고 입학식에 갔습니다. 개교 백 년이 멀지 않다는 학교의 역사나 잘 늙은 노인처럼 아름다운 석조건물들에 감탄하기 전에 비싼 등록금이 아이의 머리를 아프게 했습니다.
아이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든 건 강당을 울리는 선생님의 목소리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엔 침대에 앉아, 일하는 사람이 차려다 준 밥을 먹고 온 사람도 있고, 언 물을 깨뜨려 쌀을 씻고 밥을 지어 동생과 나누어 먹고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여러분은 다 같은 이 학교의 학생이다...이 학교는 이 나라와 사회의 사랑으로 자란 학교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 언제 어디서나 생각해야 한다.’ 아이의 젖은 눈이 학부모석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눈물이 가득한 어머니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습니다.
학교가 낯설게 느껴질 땐 늘 선생님의 존재가 아이를 위로했습니다. 선생님은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유니언메달을 받은 최초의 동양인이고 아이가 본 기독교인 중 가장 그리스도에 가깝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교회에 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못 살겠다 싶을 땐 ‘하느님! 저 좀 살려주세요!’하고 소리쳐. 그게 기도야.”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는 선생님에게서 기도 법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이와 친구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갔던 1973년, 선생님도 그곳에 계셨습니다. 시위대의 선두, 기동대의 방패 앞에 서 계시던 통치마 한복 차림이 어제 본 듯 선합니다. 박정희 씨가 대통령으로 군림한 1961년부터 1979년, 그 18년 동안 선생님은 그 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시며 시위를 주동한 제자들을 숨겨주고 민주투사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지금 청와대엔 그 대통령을 닮은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어 귀 막고 살고 있습니다. 1973년의 선생님보다 나이든 아이는 절망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신문기사에서 제자들을 달래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오래 가꾼 나무에서 아름다운 꽃을 기대할 수 있듯이 기다림은 꿈이 있는 사람들만의 자랑스러운 특권이다. 눈앞의 손가락만 보고 멀리 떠있는 달을 보지 못하는 자에겐 꿈이 있을 수 없다. 국가는 한 독재자의 사유물일 수 없다. 국가가 비록 일시적으로 압제자의 폭압에 놓인다 해도 끝내는 정의로운 국민의 열망을 받아들일 것으로 확신한다. 승부 없는 싸움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이런 시기’는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선생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기다려야 할까요? ‘하느님, 저 좀 살려주세요!’ 하고 외쳐야 할까요? 그때처럼 거리로 나가야 할까요? 선생님, 김옥길 선생님, 대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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