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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2008년 2월 22일)

divicom 2009. 11. 29. 10:21

수시, 정시, 추가 합격 등 대학 신입생을 결정하는 과정이 대충 마무리되어 갑니다. 재수하여 대학에 들어간 아이의 아버지는 오랜만에 환한 얼굴입니다. 막 재수생이 된 딸의 어머니는 심상한 말투와 다르게 표정이 어둡습니다. 사람들은 시험에 붙는 걸 좋아합니다. 이 글은 대학 입시에서 떨어진 사람들에게 쓴 글입니다. 합격의 기쁨을 만끽중인 사람들은 읽지 말기 바랍니다.

재수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듣고 “잘했네, 평균 수명도 길어졌는데, 1, 2년 쉬었다 가지!”하면 “놀리는 건가?”하는 시선으로 쳐다봅니다. 저 자신 재수를 했으며 그 일 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 년이었다고 하면 정말이냐고 묻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그 일 년을, 그 어떤 일 년과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등록금이 적고 유명한 대학에 응시했습니다. 떨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도 막상 떨어지니 우울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대학으로 학원으로 사라지고 오랜만에 혼자가 되어 이 생각 저 생각 해보았습니다. 중고등학교 6년 끝에 찾아온 1년의 자유, 그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학원도 가지 않았습니다. 재수생의 하루는 길어 읽고 싶은 책을 읽어가며 공부했습니다. 1년 후, 대학은 성적에 맞추고 학과는 적성에 맞추어 진학했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하니 즐거웠습니다.

일단 대학에 붙는 게 중요하니 전공에 신경 쓰지 말고 붙을 곳으로 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예비 38번이었는데 오늘 1차 추가 합격자 발표 후 8번이 되었다. 아직 2차, 3차도 있는데 8명은 빠지겠지? ... 간호대는 죄다 예비 1000번대를 넘어가서 아예 확인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런 생각도 했다. 내 앞에 있는 1000명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나쁜 생각도. 윽, 이렇게까지 해서 대학을 가야 하나. 가서 뭐하나. 사실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예비 8번이 된 건 너무너무 기뻐서 웃음이 나는데, 아무데나 쓴 과라서 눈물이 난다. 기쁘고 슬프고, 동시에 느끼니까 내가 미친년이 된 기분. 이 대학은 붙어도 안가, 하고 경영학과인가, 썼는데 어쩌면 여기만 붙겠다.”

대학 졸업하고 여러 십 년 흘러 돌아보니 대학 전공이란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좋아하는 걸 전공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공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성공한다”와 같은 말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제가 대학에 가던 시절에 비해 풍요로워졌지만 젊은이들은 오히려 겁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 학원 저 학원 엄마 손에 끌려 다니다보니, 자신이 원하는 게 무언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거지요. 몸은 대학에 다녀도 정신의 키는 고등학교 4, 5학년 같은 대학생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유인력의 법칙’이 존재하는 지구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은 없습니다. 실패는 사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 시험에서 실패하는 걸 “떨어진다”고 표현하는 우리말은 참으로 과학적입니다. 우리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 덕에 우리의 사고가 탄탄해지듯, 실패는 우리를 키우고 영글게 합니다. 작은 성취에 기뻐하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큰 사람인지 잊게 됩니다. 역사상 큰 인물들이 보통 사람보다 많은 고통과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탈락의 고배를 마신 젊은이들에게 축하를 보냅니다. 여러분 속에 숨어 있는 큰 사람을 불러낼 기회가 왔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전구의 실용화를 위해 필라멘트 실험을 2,000번도 넘게 했다고 합니다. “난 뭘 해도 안 돼” 라는 말을 하려면 적어도 2,000번의 실패를 해보아야 합니다. 정규교육을 3개월밖에 받지 못한 에디슨의 경우에서 보듯, 대학을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걸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원하는 학과에 응시했다 떨어졌다면 다른 학교의 같은 과를 찾아보거나 일 년 후를 기약하면 됩니다. 붙기 위해 아무 과나 응시했던 거라면, 떨어지길 정말 잘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깊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저 위 블로그의 필자처럼 우연히 붙었다고요? 저라면 가지 않겠습니다. 일 년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진 않으니까요. 그래도 이미 합격했는데 어떻게 그러냐고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얘기한 겁니다. 합격자들은 이 글을 읽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