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라는 이름을 보거나 들으면 언제나 숙연해집니다.
퇴계 이황의 자손으로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일제의 압제 아래 놓인 조국을 위해 짧은 생애를 바친 사람...
마흔 살에 중국의 일제 감옥에서 순국한 이육사를 생각할 때마다
그보다 오래 살고 있는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래는 오늘 경향신문 '여적'칼럼에 실린 조운찬 논설위원의 글입니다.
여적]이육사 순국지
지난 25일 경향신문 열하일기 답사팀은 연행사의 자취를 좇아 중국 베이징의 왕푸징을 돌아봤다. 조선 연행사의 숙소가 있었다는 진위후퉁(金魚胡同)과 천주교 동당을 둘러본 뒤 답사팀은 왕푸징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계속 걸었다. 상무인서관을 지나 화교호텔에 못미쳤을 때 건너편의 골목으로 들어섰다.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현대사연구소를 지나니 오래된 가옥들이 나타났다. 베이징시 둥청구(東城區) 둥창후퉁(東廠胡同) 28호. 이 주소 건물군의 중앙에 이육사 시인이 순국한 옛 일본영사관 감옥이 있다.
시인 이육사(1904~1944)에게 문학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퇴계 이황 가문에서 태어나 열다섯에 이미 흉중에 오천권을 품었다고 할 정도로 공부에 자부심이 컸다. 그러나 식민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20대에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베이징에서는 중국의 항일투쟁을 목도했다. 귀국하여 민족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7년 ‘대구 조선은행 폭탄사건’에 연루돼 1년7개월 감옥을 살았다. 다시 난징으로 건너가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이 세운 정치간부학교를 다녔다. 그의 본업은 독립운동이었다. 본명 이원록. ‘이활’ ‘이육사’라는 필명으로 시와 평론을 썼다. 문필활동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다. 1943년 가을, 이육사는 서울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베이징으로 압송됐다. 그리고 둥창후퉁의 지하감옥에서 고문과 취조에 시달리다 이듬해 1월16일 숨졌다.
옛 일본영사관 감옥 건물은 70여년 전 그대로였다. 내부는 연립주택으로 개조됐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컴컴한 1층 복도에서 악취가 났다. 육사가 순국한 지하 감옥은 막혀 있었다. 2층에는 몇 가구가 살고 있다. 포도넝쿨이 감아올라간 2층 건물의 마당에는 벽돌이 나뒹굴고 잡초가 무성했다. 이웃에 사는 류(劉)씨 노인은 “1940년 일본이 특무 감옥으로 지은 건물”이라며 “낡았지만 아직 철거계획은 못 들었다”고 말했다. 답사팀을 이끈 이승수 한양대 교수가 포도넝쿨 아래서 육사의 시 ‘광야’를 암송했다. ‘~다시 천고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표지판 하나 없이 방치된 이육사 순국지를 돌아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정부가 나서서 보존 방안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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