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선생님,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선생님...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다 희생된 자식들과 그로 인해 투사가 되어야 했던 분들...
부모가 투사가 될 필요가 없는 세상, 부모는 부모 노릇만 하면 되는 세상은 언제나 올까요?
지난 28일에 박정기 선생님이 타계하셨습니다.
아래는 경향신문 '여적' 칼럼에 실린 조운찬 논설위원의 글입니다.
[여적]‘6월의 아버지’ 박정기
아버지는 재로 변한 아들을 한 줌 한 줌 강물에 뿌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작별을 고했다. “철아, 잘 가그래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1987년 1월16일, 임진강에는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렇게 보냈다. 경찰의 ‘심장 쇼크사’ 발표에도 말을 아꼈다. 사망 이틀 만에 치른 영결식이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사인이 밝혀졌다. ‘물 고문과 구타에 의한 사망.’ 민주단체들은 곧바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전국에서 고문살인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국본은 6월10일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범국민대회’ 개최를 발표했다. 대회를 하루 앞두고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숨졌다. 6·10국민대회에는 50여만명이 도시 거리를 메웠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호헌철폐”. 아버지는 시위대의 펼침막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철아, 잘 가그래이….’ 임진강 허공에 부르짖던 혼잣말이 쓰여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군사정권 시절, 고문당하고 정보기관에 끌려가 의문사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의 일원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해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6월항쟁, 이한열 장례식, 노동자 대투쟁…. 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아들이 걸었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유가협 회원들 사이에서 ‘유월의 아버지’로 불렸다.
죽음의 시대, 아버지 박정기는 유가협 회원들을 보듬으며 함께 투쟁했다. “내가 박종철의 애비입니다”라는 그의 인사는 유가족들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이소선 여사에 이어 유가협 회장을 맡았다. 420일간 장기농성을 통해 ‘의문사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유가협은 한국 민주주의·인권운동의 한 축이었고, 중심에 박정기가 있었다. 박정기는 “아들이 죽음과 맞바꾸면서 지키려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화두처럼 간직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의 최후의 30년은 아들 박종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늙은 투사’ 박정기씨가 지난 28일 타계했다. 아버지마저 떠난 지금, 박종철이 남긴 화두를 잡을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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