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정치판'이라는 곳을 보고 있으면, 중요한 것은 젖혀두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습니다.
최근에 그 바닥에서 일어난 '3D' 논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쓰리 디'라고 읽든 '삼 디'라고 읽든,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배운 사람들의 '배운 척'이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일도 매우 '사소한' '배운 척'이 빚어낸
소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존경하는 김수종 선배가 오늘 자유칼럼에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쓰셨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 | | | | ‘3D프린터’ 논쟁 너머의 정치로 | 2017.0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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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들 간 지지율 변화가 역동적입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 격차가 급속히 좁혀지면서 사소한 문제를 놓고도 신경전이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말단지엽적인 문제 같은데도 각 진영은 이미지에 흠집이 날까 봐 날 세워 공격하고 방어합니다.
논쟁의 토픽은 문재인 후보의 ‘3D프린터’ 발음, 즉 ‘삼 디 프린터’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4차산업혁명'의 소재인 ‘3D프린터’를 영어 발음 ‘쓰리 디 프린터’로 읽느냐, 한글 방식으로 ‘삼 디 프린터’로 읽느냐가 그리 중요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3D프린터’ 논쟁을 제기한 것은 민주당을 탈당해서 독자적으로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입니다. 그는 문재인 후보에 반대해서 탈당하고 5일 출마를 선언하면서 작심한 듯 문재인 비판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국가는 아무나 경영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3D(쓰리디)프린터’를 ‘삼 디 프린터’라고 읽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잠깐 실수로 잘못 읽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심각한 결함입니다. 국정 책임자에게 무능은 죄악입니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달 30일 더불어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에서 4차산업혁명을 언급하다가 "전기차, 자율주행차, 신재생에너지, 그리고 삼디(3D) 프린터 등 신성장산업을 적극 육성하겠다." 고 말했습니다. 김종인 후보는 문재인 후보가 ‘쓰리 디’로 읽지 않고 ‘삼 디’로 읽었다고, 이를 무식 또는 무능의 소치로 비판할 의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3D'는 3차원이란 뜻으로 ‘3D프린터’뿐만 아니라 ‘3D영화’ 등에도 쓰이는 용어입니다. 의미는 아주 다르지만 직업을 말할 때 ‘3D업종’이란 말도 쓰입니다. 비판의 맥락은 차원을 뜻하는 D에 있었던 게 아닌가 짐작해보지만, 이런 용어를 읽을 때 꼭 ‘쓰리 디’라고 발음해야 하는지 헷갈립니다. 나는 ‘삼 디 프린터’라는 말이 이상하지 않은데 내 딸은 ‘쓰리 디’가 상식적으로 맞는다고 우겼습니다. 젊은 사람이거나 IT산업 등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3차원을 생각하며 ‘쓰리 디’로 읽는 것이 익숙한 모양입니다. 얼마나 자주 쓰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이메일 주소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때 ‘naver.com'을 ’네이버 닷 컴‘이라고 읽기도 하고 ‘네이버 점 컴’이라고 읽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직장인에게 이메일 주소를 전화로 불러줄 때도 ‘점 컴’이라고 불러주면 '닷 컴'이란 말보다 더 명확히 알아듣습니다.
사실 ‘3D프린터’를 영어로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면 3을 의미하는 ‘three’를 한국인들 중 정확하게 발음하는사람이 몇 %나 될까요.
25년 전 미국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부시 대통령(아버지)의 러닝메이트인 댄 퀘일 부통령이 영어 단어 철자를 잘못 써서 구설수에 오른 게 생각납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어느 초등학교의 스펠링 경연대회에 참관했는데 한 어린이가 칠판에 감자를 뜻하는 ‘potato'라는 단어를 쓰자 댄 퀘일 부통령이 친절하게도 그 학생이 쓴 단어를 고쳐준다며 ‘e'를 더 달아 ’potatoe'라고 틀리게 만들어 미국 언론의 가십거리가 되었습니다. '3D' 논쟁은 댄 퀘일의 철자법 실수와는 다른 정말 지엽적인 논쟁거리입니다.
문제는 이 ‘3D프린터' 논쟁이 김종인-문재인 간 논쟁이 아니라 문재인-안철수 캠프 간 논쟁으로 비화하면서
SNS에서도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안철수 후보의 관훈토론회를 구경했습니다. 관훈토론회는 대통령 후보로서 그의 정치적 견해와 더불어 인간적 면모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토론 중에 ‘3D프린터’ 발언 관련 질문이 나왔습니다. ‘3D’ 발언 논쟁에 대해 어느 게 맞느냐는 요지의 질문이었습니다. 안 후보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안 후보의 대응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안철수 후보가 대답했습니다. "용어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발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쓰리 디 프린터'라고 읽습니다."
모범 답안을 말해주는 교수님 같았습니다. 안 후보는 다른 질문에서 4차산업혁명이 1차, 2차, 3차 산업혁명과 다른 점을 매우 분석적으로 설명함으로써 IT 기업가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의 ‘3D’ 발음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을 듣고 조금 아쉬웠습니다. 4차산업혁명 이해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재치 있고 여유 있게 상대를 감싸 안는 화법을 보여줄 법도 한데 말입니다. 신문지면을 채우는 그의 경력을 보면 56년 그의 인생은 빈틈 없이 완벽함으로 채워진 것 같기에 뭔가 조금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싶은 나의 개인적 소망이 있었던 탓일까요.
문재인 후보의 대응도 여유가 없었습니다. 문 후보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우리가 무슨 홍길동입니까. '3'을 '삼'이라고 읽지 못하고 '쓰리'라고 읽어야 합니까?"라고 한글 자존심에 호소했습니다. 소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것에 빗대어 언급한 것입니다. “나는 영어 발음이 서툴러서...” “내 눈엔 3이 ‘쓰리’가 아니라 ‘삼’이라고 읽히더군요. 허허.”라고 받아넘겼더라면 어땠을까요.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가면 이 같은 '문제도 아닌 문제'로 신경전을 펼치지 말고,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 국가 안보 문제 등 중대한 이슈를 놓고 그들의 철학과 실행 방안을 토론하는 자리를 기대해 봅니다. 대통령이 사전적 지식을 많이 갖고 있으면 좋기야 하겠지만, 정말 대통령에게 중요한 건 통찰력, 판단력, 균형감각 같은 것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탄핵판결 후 대통령이 없었던 30일(사실은 120일) 동안 우리 사회는 아슬아슬하게 정치적 위기를 관리해왔습니다. 한 달 후면 우리는 새로운 지도자, 즉 제19대 대통령을 맞게 됩니다. 내일을 점치면 귀신이 웃는다는 얘기가 있지만 5월 10일 아침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 혹은 ‘안철수 대통령’이 취임하는 광경을 보게 되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대통령직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대통령선거 기간은 일종의 정치적 혼돈상태입니다. 이제 남은 30일 기간을 잘 넘기면 나라가 제 자리를 잡아가지 않을까 낙관해 봅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4년보다는 훨씬 나은 리더십을 갖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나라의 잘못을 감시하는 국민의 눈초리가 더 날카롭게 작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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