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장

벚꽃과 재앙(2014년 4월 8일)

divicom 2014. 4. 8. 10:08

봄꽃들이 여느 해보다 일찍 피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기상이변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제가 존경하는 김수종 선배는 환경전문가인만큼 더 깊이 있고 근거 있는 걱정을 하시겠지요. 오늘 아침 자유칼럼에 바로 그 얘기를 쓰셨습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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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비상소집

2014.04.08


벚꽃이 시야를 온통 하얗게 덮었습니다. 개나리, 매화, 산수유, 목련도 약속이나 한 듯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땅바닥의 이름 모를 풀에서도 보라색 노란색 꽃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기화요초 만화방창(琪花瑤草 萬化方暢)”이라는 탄식 문구가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하늘은 청명하고 기온도 포근한 3월 마지막 날 아침 아파트 뜨락의 풍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나온 주부들이 벚꽃을 보며 활짝 웃었습니다. 그들 중 배가 불룩 나온 젊은 여자가 꽃에 취한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태어날 아기가 살아갈 아름다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들에게는 정말 찬란한 봄날이었습니다.

기상청은 1922년 벚꽃 개화시기 관측 이래 3월에 벚꽃이 핀 것은 처음이었다고 밝혔습니다. 
벚꽃은 봄의 전령입니다. 제주도 서귀포에서 첫 꽃망울을 터뜨린 후 천천히 북상해서 약 보름 지난 후에 서울 여의도에 도착합니다. 올해는 그 시차가 3일밖에 안 되었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기상청은 올해 벚꽃 개화시기를 4월 8일로 예상했습니다. 틀렸습니다. 땅속의 생명의 오묘한 움직임을 기상청인들 알 리 있겠습니까. 
기상캐스터는 이미 4월 초순 날씨를 초여름이라고 떠들어댑니다. 

기상이변이건 기후변화건 느닷없는 봄꽃의 향연은 인간에겐 그저 즐겁습니다. 
그럼 꽃들에겐 축복의 3월 그믐날이었을까요? 기화요초들은 어떤 기분일까요? 
만약 식물에게도 마음이 있다면 공포에 질려 있을 게 분명합니다. 겨울잠을 느긋이 자고 싶은데 뜬금없이 밖으로 빨리 나오라는 비상소집을 당한 꼴이니까요. 지금 땅속이나 식물의 몸통 속은 조기 출동령 때문에 아우성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빨리 찾아온 벚꽃이 뭔가 불길한 전조(前兆)는 아닐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12년 전인 2002년에도 올해처럼 봄이 너무나 파격적으로 빨리 왔습니다. 서울 여의도에는 예상보다 열흘 앞당겨 4월 5일에 벚꽃이 만개했습니다. 준비하던 벚꽃 축제가 엉망이 되어버리자 지자체마다 울상이었습니다. 관광지 제주시는 벚꽃 축제가 너무 절실한 나머지 수목 전문가의 충고에 따라 얼음 가마니 수백 개를 마련하여 벚나무 밑에 묻는 해프닝을 벌였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변화를 얼음 가마니로 막으려 했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습니까.

그 해 예상치 못한 재앙이 몰려왔습니다. 3월 중순 중국 대륙에서 발생한 황사가 한반도를 누렇게 덮어버렸습니다. 휴교령이 내리고 황사 먼지로 산업생산이 차질을 빚고 병원은 호흡기 환자로 가득했습니다. 
8월 하순엔 괴력의 태풍 ‘루사’가 하루 870밀리미터의 폭우를 쏟으며 강릉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도심과 산야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며 100여 명의 인명을 앗아갔습니다. 

지난달 30일 인류에게 기후변화의 비극적 결말을 경고하는 유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위원회(IPCC)의 과학자와 정부 전문가 수백 명이 3월 말 일본 요코하마에 모여서 기후변화가 진행되는 현황과 그 영향을 예측하고 평가해서 보고서를 만들었습니다. 유엔은 이 보고서를 토대로 오는 9월 유엔에서 기후변화 정상회의를 열고 내년에 새로운 기후변화조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뉴욕타임스가 발췌해서 보도한 것을 보면 이 보고서는 온통 비극적인 예측으로 가득합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후변화는 이미 전 대륙과 해양에 파죽지세로 결정적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고산 빙하의 후퇴, 북극해 얼음의 붕괴 소멸, 물 공급의 부족, 열파와 폭우의 증가, 산호의 죽음, 물고기의 대이동과 멸종 등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은 이전에 나온 보고서를 통해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다시 한 번 위기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번 보고서에서 강조된 부분은 기후변화에 의한 식량안보와 대규모 인구이동이 몰고 올 국제사회의 충돌과 분쟁입니다. 기후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세계 주요 곡물 산지의 생산이 기술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균형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 보고서는 경고합니다. 

농업 부문이 얼마 되지 않고 굶주림을 별로 모르고 살아온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기후변화의 재앙은 별로 피부에 닿지 않는 이야기로 들릴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 지구 한쪽 구석의 재앙이 온 세계로 전파된다는 것은 지난 3월 중국에서 발생한 미세먼지가 서울시민들을 괴롭힌 사례를 통해 절감할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 채택을 계기로 뉴욕타임스가 기후변화로 절박한 상황에 이른 방글라데시의 저지대 지역을 탐사 취재해서 보도한 기사가 아주 절절하게 기후변화의 재앙을 전해줍니다.

한국보다 좀 넓은 15만 평방킬로미터의 국토에 1억6천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방글라데시는 빈곤국의 상징입니다. 간지스강 삼각주에 자리 잡은 방글라데시는 국토의 25%가 표고 2.1미터 이하의 저지대입니다. 사이클론(태풍) 등 자연재앙이 내습하면 피난도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보통 3미터 이상의 물기둥이 저지대를 휩쓸어버리기 때문입니다. 1970년에 발생한 사이클론 ‘볼라’로 무려 55만 명이 사망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 이후 둑과 제방을 쌓는 것이 방글라데시의 국가적 과제로 부각되어 인명피해는 많이 줄어들었으나 앞으로 닥칠 해수면 상승에는 속수무책이라는 게 현지 전문가들의 예측입니다.

벵골 만에 위치한 방글라데시는 바다 수위 상승이 다른 곳보다 심합니다. 2100년 세계 평균 해수면 상승이 최고 90센티미터에 이를 것이라고 유엔기구는 예측합니다. 그러나 벵골 만 연안 지역은 그 4배가 넘는 3.9미터에 이를 것이라는 전문가의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국토의 30% 이상이 물속에 잠겨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방글라데시의 기후 과학자 아티크 라만 박사의 비관적 결론은 이렇습니다. 
“2050년까지 5천만 명이 땅을 잃고 외국으로 피난할 것입니다.”

5천만 명이면 지금 한국 인구입니다. 피난민 5천만 명을 상상해보면 아찔한 일입니다. 살 곳을 잃고 굶주림에 지친 5천만 명을 받아줄 나라가 있을까요? 분쟁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지금까지 환경주의자나 과학자들은 바다 수위 상승의 위험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남태평양의 투발루나 인도양의 몰디브의 위기를 주로 얘기해왔습니다. 기껏해야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사는 작은 섬들입니다.

그러나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재앙은 인구 1천만 이상의 도시가 많은 아시아 대륙의 저지대가 물속에 잠기는 사태입니다. 

사람들은 미래학자나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일이 언젠가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무인자동차, 입는 디지털기기, 원격치료 등등 공상과학이 모두 현실화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구 과학자들은 이대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해나가면 2050년에 세계의 기후가 뒤죽박죽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험하고 험한 세상이 도래한다는 예측입니다. 이런 예측이 기우(杞憂)일까요.

화사한 벚꽃 아래서 배를 쓰다듬던 젊은 엄마와 태어날 아기는 2050년에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까요. 

필자소개

김수종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 생활. 환경과 지방 등에 대한 글을 즐겨 씀.
저서로 '0.6도' '다음의 도전적인 실험' 등 3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