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한겨레신문 '삶의 창'에 실린 제 칼럼입니다. 설이 다가오니 친구들이 보고 싶습니다.
일이 잘 되어갈 때는 세상 사람이 다 친구 같고, 일이 그럭저럭 되어갈 때는 세상 사람 절반 쯤이 친구 같지만, 일이 잘 되어가지 않을 때 떠오르는 친구는 드뭅니다. 그 드문 친구, 내겐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인가 자문해 봐야겠지요?
의사가 되고 싶은 친구에게
설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무거운 마음으로 귀향길에 오를 다영씨가 생각납니다. 대학 가는 사람이 많지 않은 시골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서울의 대학을 졸업하고 더 좋다는 대학원에 진학했으니 모든 이들의 기대를 모았겠지요. 게다가 시대의 총아인 마케팅 분야에서 각광받는 학문을 전공했으니 기대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도 없을 겁니다.
그렇게 남들이 부러워하는 학교에서 남들이 좋다고 하는 전공과목을 공부한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학교를 나와 비슷한 분야에 취업한 사람들의 초봉이 내 일년 수입의 두어 배가 된다기에 내심 기뻤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온 다영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지요. 높은 연봉으로 편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다고,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일년 동안 홀로 공부하는 다영씨를 지켜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모두가 축복해주는 길을 버리고 모두가 반대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에겐 나날이 시련이니까요. 99퍼센트 확실해 보이는 길 대신 99퍼센트 불확실해 보이는 길로 들어섰으니 때로는 머리를 흔드는 회의와 싸우며 때로는 끝없는 눈총과 말 화살을 맞으며 괴로웠을 겁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기도뿐일 때가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진료실 밖의 의사들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궐기대회와 시위현장의 의사들을 보니 그동안 내가 만났던 의사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머니를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준 의사들, 맹장염에 걸린 아우에게 진통제를 놓아 복막염이 되게 한 의사, 내가 기진맥진할 때마다 일으켜 세워 주는 황 선생님, 최근에 만난 ‘이상한 의사’까지.
양의, 한의, 외과의, 내과의, 의사를 분류하는 단어는 많아도 의사는 결국 두 종류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이지요. 사람 구하기를 목표로 삼는 의사와 돈을 목표로 하는 의사는 돈을 버는 방식뿐만 아니라 쓰는 방식에서도 구별됩니다. 전자가 돈을 벌면 그 돈을 자신과 가족이 아닌 질병과의 투쟁에 씁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은 대개 부자가 되지만 불행한 부자가 됩니다. 남의 고통 덕에 쌓인 재산을 자신의 복락을 위해 쓰니까요.
‘이상한 의사’는 두어달 전 동네 의원에서 만났습니다.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혈압을 재더니 혈압이 높다고 했습니다. 빨리 걸어와서 그런 것 같기에 조금 있다가 다시 재보자고 하니 ‘외간 남자와 앉아 있으니 흥분이 되어 그런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 사람은 내게 비타민 디가 부족하다며 비타민 디 주사를 맞으라고도 했습니다. ‘강남에서는 10만원도 넘지만 5만원에 해주겠다’며.
다영씨, 지난 연말 한참만에 만났을 때 이번에 입학이 안 되면 더 공부해 다시 시도할 거라고 했지요? 힘들 걸 알면서도 만류하지 못한 건 다영씨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의사, 교사, 법조인, 언론인, 공무원. 세상의 기둥이어야 할 직업인들, 사람을 사랑하며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진력해야 할 사람들이 사명감을 잊고 돈과 명예를 추구하면서 세상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설날, 고향에 가면 또 질문 공세가 쏟아지겠지요. ‘너 미쳤냐? 고생하는 부모가 안 보이냐?’는 말이 상처에 닿는 소금처럼 따가울 거예요. 그럴 땐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불행 때문에 남을 힐난한다는 것, 인간의 위대함은 ‘미쳤냐’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발현된다는 것. 불확실한 삶에서 확실한 마음을 따라가는 것보다 옳은 일은 없을 거예요. 다영씨, 그대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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