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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8년 3월 7일)

divicom 2009. 11. 29. 10:27

3월에 들어서자 날씨가 아주 달라졌습니다. 부지런한 나무들엔 푸른 물이 오르고 겨우내 집안에서 생활하던 노인들이 문 밖을 나서는 일이 잦아집니다. 출근 시간 지나 한가하려니 하고 탄 지하철엔 어르신들이 빼곡합니다. 낮이 길어지니 저 분들의 하루도 길어지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합니다. 문득 최근 미국에서 제일 권위 있는 영화상이라는 아카데미상의 4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떠오릅니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의 8개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 각색상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과 각색을 맡았던 에단과 조엘 코언 형제는 영국 아카데미상의 감독상, 미국 작가조합상 등 유수의 상을 휩쓴 후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수상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영화계의 총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제목을 보고 노인들이 주인공이거나 발붙일 곳 없는 노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려니 짐작하고 영화를 보러갔던 사람들은, 피가 낭자하고 총질이 난무하는 화면 앞에서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네티즌들이 이 영화에 호평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근데 이 영화에 왜 이런 제목이 붙은 거죠?”라고 묻는 걸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제인 ‘No Country for Old Men’은 ‘노인이 살 곳은 아니다’ 라고 번역하는 게 나을지 모릅니다. 의역을 해서 ‘이제 이 세상은 노인이 살만한 곳이 아니야’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사냥을 하던 모스는 우연히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는 곳에 이르게 되고 트럭 안에서 총상을 입고 죽어가는 남자와 돈 가방을 발견합니다. 모스는 갈증을 호소하는 남자를 남겨둔 채 현금이 가득 담긴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두고 온 남자에 대한 가책을 이기지 못합니다. 다시 물통을 챙겨들고 그곳으로 간 모스는 그때부터 빗발치는 총탄 세례 속에 추격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모스. 죽음처럼 무감한 살인마 안톤, 그들을 뒤쫓는 보안관 에드, 안톤과 거래를 시도하는 해결사 칼슨...

코언 형제는 이 영화가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관객의 반응은 영화 속 죽음의 형태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미국의 텍사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추격전에 열광하며 완벽한 스릴러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인물들의 성격을 분석함으로써 존재론적이고 사회심리학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스는 욕망으로 가득한 소시민이며, 안톤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찾아오는 죽음, 에드는 경험 많은 노인, 칼슨은 잘난 척하는 현대인이라고.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더 이상 예측이 불가능한 삶의 메타포입니다. 전체를 압도하는 살상과 폭력은 삶이 더 이상 전통적 가치관과 선악관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러니 제목의 ”Old Men"은 단순히 나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랫동안 세상의 잣대 노릇을 했던 권선징악에 기대어 살아온 사람들 모두를 뜻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한때는 이 세상의 삶도 예측이 가능했습니다. 영아사망률은 높았지만 아기 시절을 살아내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청년기와 장년기를 보냈고, 존경받는 노년의 삶이 상처럼 주어졌습니다.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프랜차이즈 빵집도 없고 수만 마일 떨어진 이국의 과일을 맛볼 수도 없었지만, 싸움이라면 기껏 주먹질이었고 그나마도 잠깐 혈기를 다스리면 피할 수 있었으니 삶은 그런대로 평화로웠습니다. 게다가 삶의 종장부인 노년이 별로 길지 않아 본인에게나 주변의 자손들에게 짐스러운 존재가 되기 전에 생을 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속 살인마의 동전 던지기처럼, 삶은 언제부턴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며 절대와의 싸움을 벌이는 대신, “좀 더 많이 갖겠다”고 상대적 우위를 목표로 하게 되면서 평화는 사라졌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더 많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힘은 약하고 머리 회전은 느린 노인들이 설 땅은 차츰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노인들은 마음도 몸도 물질적으로도 가난합니다. 의학의 발달은 존경은커녕 연민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노인들의 시간까지 연장하고 있습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노인들은 더 가난해지고 노인의 풍부한 경험이란 약한 자의 자위를 위한 추억거리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게으르지 않고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악화되지 않던 삶이 경쟁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악화일로를 걷게 되면서 세상은 온통 상처 입은 사람들 천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불행이 자신의 게으름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어 경쟁에서 이긴 사람조차 마음 놓고 승리를 향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은 상처를 주는 법, 영화에서처럼 우연히 어떤 시각에 어떤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필연으로 이루어진 과학이 각광 받는 시대에 우연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아이러니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대개의 명작이 그렇듯, 이 영화는 악화된 세상을 보여줄 뿐 아무런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려하지 않으니 이것을 보고 반성적 사유를 하는 건 관객의 몫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에 주목하는 젊은이들이나 경쟁에서 이겨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기껏 “세상에 공짜는 없다”거나, “쓸데없이 동정을 부리다간 큰 코 다친다” 는 식의 실용적 깨달음을 얻는데 그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폭력적인 영화에서 좀 더 깊은 의미를 읽어내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우리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하는 세상을 붙잡아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삶을 평화롭게 해주던 오래된 가치들을 현재에 되살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말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경쟁에서 이기려 하지 않고 많이 갖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점차 나빠지게 하는 동료인간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부디 그들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은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가장 힘없는 “노인을 위한 나라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