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2019년 5월 14일)

divicom 2019. 5. 14. 07:50

자녀들이 출산하며 할머니가 되는 친구들이 늘어납니다.

십년 전쯤 할머니가 된 사람도 있고 이제 막 할머니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손녀 손자를 보아 할머니가

되는 건 대개 좋아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끝내 할머니가 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녀가 없거나 자녀가 있어도 아이를 출산하지 않으면

할머니가 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손자 손녀는 없어도 남의 손자 손녀는 많고

나이가 들면 그들로부터 할머니 대우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엊그제 시내버스를 타고 귀가할 때였습니다.

승객이 제법 많아 간신히 1인석 몇 개가 있는 곳에 설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 앞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어린이가 앉아 있고

그 아이 앞, 제 옆에는 그 아이의 친구인 듯한 어린이가 서 있었습니다.


앉은 아이가 저를 한참 관찰하고 친구와 뭔가 의논하는 것 같더니

의자에서 일어나며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지만 흰머리 일색이니 

이 사람이 자리를 양보 받아야 할 할머니인가 아닌가

고민한 끝에 할머니로 결론 지은 것 같았습니다.


조카의 아이들이 있지만 아직 정확히 할머니라 부르는 소릴 못 들었으니

그 어린이의 '할머니'는 제 생애 최초로 듣는 '할머니'였습니다.

고민 끝에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로 마음먹은 어린이가 참으로 귀여웠지만

"고마워요. 근데 괜찮아요, 그냥 앉아 있어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보였습니다.

저는 다시 "그러면 이 가방 좀 들어줄래요?" 하고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가리켰습니다. 어린이는 기쁜 듯 "네!" 했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끌어안고 있는 아이가 참 귀여웠습니다.

도중에 "가방, 무겁지요?" 하고 물어 보았더니

무슨 그런 소릴 하느냐는 듯 "아니요" 하고 씩씩하게 답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아이의 앞 자리 '임신부 석'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내렸습니다. 아이가 빈자리와 저를 번갈아보며 '할머니가 왜 앉지 않을까'

의아해 하는 것 같아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이 자리는 임신한 사람을 위한 자리인데 나는 임신을 안해서 안 앉는 거예요."

아이가 알겠다는 듯 "네" 했습니다.


두어 정거장 더 간 후에 아이의 뒷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내렸습니다.

아이는 눈을 빛내며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유, 고마워요, 근데 다음에 내리니까 안 앉을래요." "네."


집에 간 후에도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하던 귀엽고 수줍은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아이 얘기를 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그 아이도 집에 가서 제 얘기를 했을지 모릅니다.

혹시 했다면 제가 그 아이 얘기를 할 때처럼

웃으며 했기를 바랍니다.


할머니가 되는 건 참 좋은 일입니다.

어머니가 되는 것에 비해 의무도 노동도 적고

그냥 사랑만 하면 되니까요.


제 인생 목표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실천 목표는 멋진 할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멋진 할머니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날 버스에서 만난 어린이가 '친구 먹고' 싶어 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