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a

김재은 씨네 '풍년떡집' (2018년 봄 제 32권 1호)

divicom 2020. 5. 6. 10:48

 

 

'코리아나(Koreana)'는 외무부 산하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이 발행하는 계간지로 한국을 해외에 소개하는 매체입니다. 저는 한동안 이 계간지의 '이 사람의 일상(An Ordinary Day)'이라는 코너를 맡아 취재하고 글을 썼습니다. 제가 쓴 글들을 여기에 옮겨둡니다.

 

https://koreana.or.kr/user/0009/nd8924.do?View&boardNo=00001565&zineInfoNo=0009&pubYear=2018&pubMonth=SPRING&pubLang=Korean

 

 

동이 트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은 남았는데 떡집은 벌써 불을 환히 밝히고 분주하다. 그래서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떡집 주인이 되기 어렵다. 20년 동안 서울의 조촐한 주택가에서 작은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 밤잠을 설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서울 남가좌동 주택가의 풍년떡집에서 안주인 김재은 씨가 스티로폼 팩에 여러 가지 떡을 조금씩 담아 진열하고 있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동네 손님들이 이 떡들을 사가고, 그중에는 주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김재은(金材恩) 씨의 인생은 떡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힘들게 일하면서 불행했다면 이후에는 힘들게 일하지만 행복하다. 떡은 그를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되찾아 준 고마운 직업이다. 
그가 운영하는 풍년(豊年)떡집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 중 하나인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재은 씨와 남편 오세영(吳世英) 씨는 날마다 각양각색의 떡을 만들어 내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출근 시간이요? 새벽 2시, 3시, 4시….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주문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달라지죠. 하지만 몇 시에 출근하든 퇴근은 저녁 7시쯤 해요. 지하철역 부근이나 도심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있는 떡집들은 밤 10시가 넘도록 문을 열기도 하는데, 우리 가게는 주택가에 있어서 어두워지면 손님이 끊기거든요.”
떡에는 방부제 같은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즉시 신속하게 배달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배달이 있는 날엔 특히 이른 새벽에 나와야 한다. 
재은 씨의 노트에는 주문 내용을 비롯해 배달해야 할 날짜와 시각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떡집의 하루는 오늘 시작해서 오늘 끝나지 않는다. 어제 시작해 오늘 끝나기도 하고, 오늘부터 내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 떡을 만들려면 어제부터 준비해야 하고, 내일 떡을 만들려면 오늘 쌀을 씻어 미리 불려 놓아야 한다. 또 퇴근 전엔 언제나 내일 배달해야 할 떡을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팥, 콩 등 재료를 준비한다.

콩고물이나 팥고물로 소를 넣은 후 느슨하게 반달 모양으로 빚어 만드는 바람떡은 맛이 달달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찰과 교회가 주요 고객
가게에 나오면 우선 떡을 찌는 보일러에 불을 켜고, 어제 씻어 물에 담가 놓았던 쌀을 건져 방아기계에 찧는다. 열 평 남짓한 풍년떡집에는 방아기계 세 대가 있다. 찧은 쌀가루를 분쇄기에 곱게 간 후 스테인리스 시루에 담아 찜통에 얹는다. 
떡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개 10~15분이면 맛있는 떡이 완성된다. 그 종류가 가래떡, 시루떡, 인절미, 약식, 모시송편, 바람떡 등 일일이 열거하기 벅찰 정도다. 그중에서도 풍년떡집의 대표 메뉴는 찹쌀 시루떡이다. 이 떡을 위해 매일 팥을 두 말(16kg)씩 삶는다. 주문 받아 만든 떡은 세영 씨가 배달하고, 몇 가지는 스티로폼 팩에 조금씩 담아 창문 앞 가판대에 진열해 놓고 판매한다. 
“모든 음식이 다 그렇지만 떡 맛의 비결은 좋은 재료예요. 언니가 전북 익산에서 직접 농사 지은 쌀, 팥, 콩 같은 재료들을 보내 줘요. 손님들 입맛이 까다로워서 재료 나쁜 것 쓰면 금방 알아요.” 
풍년떡집의 가장 큰 고객은 인근의 절과 교회다. 세영 씨의 오토바이로 약 10분 거리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인 8세기에 지어진 절로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의식도 많다. 절에서는 콩가루에 버무린 찹쌀 인절미와 멥쌀가루에 녹두나 팥 고물을 켜켜로 얹어서 찌는 제사용 시루떡을 주로 주문한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입맛에 맞게 여러 가지 떡을 그때그때 주문한다. 재은 씨는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주 고객이 종교 시설이다 보니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스티로폼 팩에 담아 파는 떡은 일종의 맛보기용이다. 이렇게 맛본 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 집 단골은 지난 20년간 계속 늘어났다. 전에는 주문 떡과 팩 떡의 매출이 6대 4쯤 되었지만, 이젠 9대 1에 이른다. 주택가에 자리 잡은 위치 때문인지 팩 떡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학생부터 주부, 노인까지 다양하고 방문 시간대도 일정치 않다. 젊은이들은 달콤한 꿀떡을, 나이든 손님들은 담백한 시루떡이나 인절미를 많이 찾는다. 정초에는 가래떡을 타원형으로 얇게 썬 떡국용 떡이 가장 잘 팔린다. 개업 초기만 하더라도 쌀을 직접 들고 와 가래떡을 뽑아가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이젠 거의 만들어 놓은 것을 사간다.

멥쌀가루를 쪄서 기계에 넣어 둥글고 길게 뽑아 내는 흰 가래떡은 거의 모든 떡집의 기본 품목이다. 설 명절을 비롯해 평소에도 많은 가정에서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떡국을 끓여 먹거나 혹은 떡볶이로도 만들어 먹기 때문이다.

인쇄소를 접고 떡집을 열다 
한민족은 원시 농경시대부터 이미 떡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떡을 만드는데, 중국에선 주로 밀가루를 쓰고 일본에선 찹쌀가루를, 한국에선 멥쌀가루를 많이 쓴다. 한국의 떡은 농업 기술과 조리 가공법이 발달한 조선 시대에 이르러 종류와 맛이 한층 다양해졌는데, 오늘날 한국인이 먹는 떡은 대개 그때의 방식을 따른다. 
한국의 떡은 만드는 법에 따라 증병(甑餠), 도병(擣餠), 전병(煎餠), 단자(團子) 등으로 불린다. 증병은 백설기나 팥 시루떡처럼 시루에 찐 떡이며, 도병은 인절미처럼 안반이나 절구에 쳐서 만든 떡이고, 화전(花煎)으로도 불리는 전병은 곡식 가루 반죽을 기름에 지진 떡이다. 그리고 경단(瓊團)으로 알려진 단자는 찹쌀이나 찰수수 가루 반죽을 밤톨만 하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 고물을 묻힌 것이다. 
12세기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미 도병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구절이 있고, 13세기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떡이 제수로 쓰였음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떡은 요즘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상에 올리고, 첫돌을 비롯해 생일에는 흔히 떡을 해서 축하한다. 특히 음력 새해 첫날인 설 명절엔 많은 가정에서 썬 가래떡을 고기 국물에 넣어 끓인 떡국을 먹는다.

추석엔 새로 거둔 쌀을 빻아 반죽해 만든 반달형 떡에 깨, 콩, 밤 등 소를 넣어서 솔잎과 함께 찐 송편을 먹는데,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만들어 먹는 집이 많았으나 이젠 대부분 떡집에서 사다 먹는다. 아울러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식 하객들에게 주로 떡을 답례로 주곤 했으나 요즘엔 답례품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기본적으로 떡 소비가 줄었어요. 전에는 혼사에 쓰이는 이바지 음식에도 떡이 꼭 들어갔지만 이젠 잘 안 해요. 백일이나 돌잔치에 하던 백설기나 수수팥떡도 요즘 부모들은 거의 하지 않고, 어쩌다가 할머니가 손주의 돌을 맞아 조금 하는 정도예요.” 
김재은 씨가 태어난 1960년대 후반엔 떡이 아주 인기 있는 별식이었지만, 그는 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재은 씨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또래들보다 조금 늦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다른 인쇄소 직원이던 세영 씨를 소개받았고, 두 사람은 재은 씨가 25세, 세영 씨가 30세 때 결혼했다. 결혼은 했지만 재은 씨는 남편을 좋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인쇄소를 하다 두 번이나 실패하고도 여전히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세영 씨가 종로에서 운영하던 인쇄소가 고전할 무렵 옆에 있던 떡집은 아주 잘되었다.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인쇄소 일이 갈수록 줄어들자 세영 씨는 주말마다 이웃 떡집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인쇄소를 접고 본격적으로 떡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웃 떡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떡의 세계에 빠진 세영 씨에게 그 떡집은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세영 씨는 매일 새벽 오토바이로 1시간을 달려 그곳으로 출근했다가 한밤중에 돌아왔고, 그러는 동안 재은 씨는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2년 후인 1999년 8월, 부부는 빚을 얻어 남가좌동의 풍년방앗간을 인수해 풍년떡집을 열었고, 재은 씨는 세영 씨의 수제자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일손을 놓아도 풍년떡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주문 받은 떡의 배달은 떡집의 바깥주인 오세영씨의 담당이다.

남편을 다시 보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한 번에 주문하는 양은 줄었지만 전체 매상은 늘었으니 손님 수는 늘어났다고 봐야죠.”
그 사이 부부는 빚을 갚았고 재은 씨는 떡을 사랑하게 됐으며, 두 딸은 대학을 졸업했다. 큰딸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됐고, 현대무용을 전공한 둘째 딸은 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만 재은 씨가 떡을 ‘인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떡 덕분에 남편을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돈 생각은 못하고 떡 생각만 해요. 어떻게 해야 떡을 잘 만들까 그것만 생각하니 마치 예술가 같아요. 처음엔 그다지 좋아할 수 없었는데 점점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자그마한 체구에 남달리 강건한 모습이랄 수도 없지만 재은 씨도 풍년떡집의 주인이 된 후 떡만 생각하는 남편 곁에서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이 일을 해 왔다. 그에게 남은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일손을 놓아도 풍년떡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재은 씨는 떡 덕분에 행복하긴 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5년쯤 후엔 떡집을 그만두고 쉬고 싶다”고 말했다. 큰딸과 사위에게 떡집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얘기해 놓긴 했지만, 너무 힘든 일이라 강권할 수는 없다. 재은 씨가 정말 떡집을 떠날 수 있을지는 그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다. 
“인생이 꼭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요.”

김흥숙(Kim Heung-sook 金興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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