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은 남았는데 떡집은 벌써 불을 환히 밝히고 분주하다. 그래서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떡집 주인이 되기 어렵다. 20년 동안 서울의 조촐한 주택가에서 작은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를 만나 밤잠을 설치며 살아온 지난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서울 남가좌동 주택가의 풍년떡집에서 안주인 김재은 씨가 스티로폼 팩에 여러 가지 떡을 조금씩 담아 진열하고 있다. 학생부터 노인까지 동네 손님들이 이 떡들을 사가고, 그중에는 주문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김재은(金材恩) 씨의 인생은 떡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이전에는 힘들게 일하면서 불행했다면 이후에는 힘들게 일하지만 행복하다. 떡은 그를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사랑을 되찾아 준 고마운 직업이다.
그가 운영하는 풍년(豊年)떡집은 서울의 오래된 동네 중 하나인 남가좌동에 있는 명지대학교 후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재은 씨와 남편 오세영(吳世英) 씨는 날마다 각양각색의 떡을 만들어 내느라 하루 종일 분주하다.
“출근 시간이요? 새벽 2시, 3시, 4시…. 그때그때 달라요. 어떤 주문이 들어오느냐에 따라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 달라지죠. 하지만 몇 시에 출근하든 퇴근은 저녁 7시쯤 해요. 지하철역 부근이나 도심처럼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있는 떡집들은 밤 10시가 넘도록 문을 열기도 하는데, 우리 가게는 주택가에 있어서 어두워지면 손님이 끊기거든요.”
떡에는 방부제 같은 보존제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만드는 즉시 신속하게 배달해야 한다. 그래서 아침 일찍 배달이 있는 날엔 특히 이른 새벽에 나와야 한다.
재은 씨의 노트에는 주문 내용을 비롯해 배달해야 할 날짜와 시각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떡집의 하루는 오늘 시작해서 오늘 끝나지 않는다. 어제 시작해 오늘 끝나기도 하고, 오늘부터 내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늘 떡을 만들려면 어제부터 준비해야 하고, 내일 떡을 만들려면 오늘 쌀을 씻어 미리 불려 놓아야 한다. 또 퇴근 전엔 언제나 내일 배달해야 할 떡을 확인하고 그에 맞추어 팥, 콩 등 재료를 준비한다.
반면에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입맛에 맞게 여러 가지 떡을 그때그때 주문한다. 재은 씨는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니지만 주 고객이 종교 시설이다 보니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스티로폼 팩에 담아 파는 떡은 일종의 맛보기용이다. 이렇게 맛본 후 주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 집 단골은 지난 20년간 계속 늘어났다. 전에는 주문 떡과 팩 떡의 매출이 6대 4쯤 되었지만, 이젠 9대 1에 이른다. 주택가에 자리 잡은 위치 때문인지 팩 떡을 애용하는 사람들은 학생부터 주부, 노인까지 다양하고 방문 시간대도 일정치 않다. 젊은이들은 달콤한 꿀떡을, 나이든 손님들은 담백한 시루떡이나 인절미를 많이 찾는다. 정초에는 가래떡을 타원형으로 얇게 썬 떡국용 떡이 가장 잘 팔린다. 개업 초기만 하더라도 쌀을 직접 들고 와 가래떡을 뽑아가는 손님들이 많았지만, 이젠 거의 만들어 놓은 것을 사간다.
추석엔 새로 거둔 쌀을 빻아 반죽해 만든 반달형 떡에 깨, 콩, 밤 등 소를 넣어서 솔잎과 함께 찐 송편을 먹는데,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직접 만들어 먹는 집이 많았으나 이젠 대부분 떡집에서 사다 먹는다. 아울러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결혼식 하객들에게 주로 떡을 답례로 주곤 했으나 요즘엔 답례품의 종류가 다양해졌다.
“기본적으로 떡 소비가 줄었어요. 전에는 혼사에 쓰이는 이바지 음식에도 떡이 꼭 들어갔지만 이젠 잘 안 해요. 백일이나 돌잔치에 하던 백설기나 수수팥떡도 요즘 부모들은 거의 하지 않고, 어쩌다가 할머니가 손주의 돌을 맞아 조금 하는 정도예요.”
김재은 씨가 태어난 1960년대 후반엔 떡이 아주 인기 있는 별식이었지만, 그는 떡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재은 씨는 전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또래들보다 조금 늦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학년 때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다른 인쇄소 직원이던 세영 씨를 소개받았고, 두 사람은 재은 씨가 25세, 세영 씨가 30세 때 결혼했다. 결혼은 했지만 재은 씨는 남편을 좋아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었다. 남편이 인쇄소를 하다 두 번이나 실패하고도 여전히 술을 지나치게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세영 씨가 종로에서 운영하던 인쇄소가 고전할 무렵 옆에 있던 떡집은 아주 잘되었다.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인쇄소 일이 갈수록 줄어들자 세영 씨는 주말마다 이웃 떡집에서 일손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인쇄소를 접고 본격적으로 떡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이웃 떡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는데, 떡의 세계에 빠진 세영 씨에게 그 떡집은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세영 씨는 매일 새벽 오토바이로 1시간을 달려 그곳으로 출근했다가 한밤중에 돌아왔고, 그러는 동안 재은 씨는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며 가계를 도왔다. 2년 후인 1999년 8월, 부부는 빚을 얻어 남가좌동의 풍년방앗간을 인수해 풍년떡집을 열었고, 재은 씨는 세영 씨의 수제자이자 동업자가 되었다.
그에게 남은 바람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건물주가 월세를 올리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일손을 놓아도 풍년떡집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