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 이명박 대통령과 김윤옥 여사가 동계올림픽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내고 돌아온 밴쿠버동계올림픽 선수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는 선수들과 임원진 등 120여 명이 참석했는데, 금메달을 딴 선수뿐만 아니라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도 헤드테이블에 동석했으며, 대통령의 바로 오른쪽에 스피드스케이터 이규혁 선수가 앉았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여론을 의식해 일부러 그랬을 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때로는 위선이 정직보다 정의에 기여할 때도 있습니다. 청와대 자리 배치에 특히 신경을 쓰는 건 전날에 있었던 메달리스트들의 기자회견 때문입니다. 대한체육회가 메달리스트 위주로 자리를 배치해 피겨스케이팅에서 13위를 한 곽민정이 앉을 자린 없었다는 보도를 보았거든요.
선수들은 올림픽과 각종 국제대회에서 선전을 거듭하지만, 선수들을 지원하고 응원해야 할 우리나라 체육단체들은 언제나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다’는 올림픽 정신을 배우고 ‘메달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지, 관변단체들이 언제나 최소한의 교양을 갖게 될지, 참 한심합니다. 아니, 그런 단체만을 비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서 박성광이 소리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 된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요.
이규혁 선수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건 바로 그래서입니다. 메달리스트만 대우하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선수를 만나본 적도 없고 이 선수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이 선수를 존경하고 그와 같은 사람이 계속 나와 주기를, 그래서 ‘더러운 세상’에 빛이 되어주기를 희망합니다.
이 선수는 다섯 번째로 참가한 올림픽인 이번 대회 500미터 부문에서 15위, 1000미터 부문에서 9위를 했습니다. 1978년 생으로 스피드스케이터로서는 환갑 나이라고 하니 다시 올림픽경기장에 서는 건 어려울지 모릅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만 보아도 모두 20대 초반입니다. 이 선수가 16세의 나이로 올림픽에 출건했을 때 4, 5세 코흘리개였던 아기들이 메달리스트가 된 것이지요.
이 선수는 1994 릴레함메르 올림픽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98년 나가노 올림픽,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올림픽 최고 성적은 토리노에서 거둔 1000 미터 부문 4위의 기록입니다. 지난 1월 일본에서 있었던 세계스프린트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차지해 밴쿠버올림픽 500 미터 부문의 금메달 후보로 꼽혔지만 15위에 머무르고 말았습니다. 500미터를 뛸 때 경기가 오래 지연되어 부담이 컸고 그로 인해 1000미터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2월 18일 모태범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미터 부문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후, 캐나다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 경기장에 홀로 있던 이규혁 선수가 호형호제하던 제갈성렬 춘천시청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마지막 올림픽 여운을 느껴보고 싶은데 여기 관중이 아무도 없어”라며 울먹였다고 합니다. 이틀 후 기자회견에서 이 선수는 “안 되는 것에 도전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고 다시 울먹였습니다.
메달을 딴 후배들은 모두 이규혁 ‘삼촌’에게 감사한다고 했지만 이 선수는 “내가 가르친 것보다 후배들에게 배운 게 더 많다.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것조차 이제 나한테는 욕심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갖지 못한 메달을 후배들이 갖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지금 대표팀은 자신이 바라던 모습을 갖추었다며 “내가 아닌 후배들이 끝까지 열심히 할 거니까 계속 지켜봐 주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에 따르면, 이 선수의 아버지 이익훈 씨는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 선수로 1968년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고, 어머니인 이인숙 씨는 피겨스케이팅 선수 출신이라고 합니다. 부모의 유전자 덕인지 이 선수는 어려서부터 ‘빙상 신동’ 소리를 듣다가 신사중학교 재학 중 주니어 국가대표로 1992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으며, 그 후 무수한 세계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했습니다. 1997년 12월엔 1000미터에서 1분 10초42를 기록,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기록을 세웠고, 2001년 3월엔 1500미터를 1분 45초20으로 달려 또 한 번 세계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이런 이 선수지만 유독 올림픽 메달과는 인연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선수가 안 되는 것에 도전하는 게 너무 슬펐다고 할 때 그의 머릿속엔 따지 못한 올림픽 메달들이 스쳐갔을 겁니다. 그러나 올림픽 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그는 우리의 영웅입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모태범과 이정수와 이상화와 수많은 다른 스케이터들이 거둔 성취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테니까요. 바로 그래서 메달을 딴 후배들이 기쁨의 한가운데서 ‘삼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일 겁니다.
재능이 있다는 건 축복이지만 한편으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남보다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려서부터 ‘빙상 신동’ 소리를 들은 이 선수에게 자유롭게 뛰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은 없었을 겁니다. 14세에 세계 주니어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고 2년 후엔 올림픽에 참가했으니 십대와 사춘기도 정신없이 보냈을 겁니다. ‘피겨 여왕’이 된 김연아 선수도 일곱 살 어린 나이에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해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김 선수가 13년 만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걸 생각하면 훨씬 오랜 시간을 빙판 위에서 보낸 이규혁 선수의 올림픽 노메달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성취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다양하게 인정받습니다. 김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과 전무후무한 점수로 인정을 받았다면, 이 선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스피드스케이팅의 역사를 세운 선수로, 또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섯 번의 올림픽에 도전한 위대한 정신력으로 기억될 겁니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건 서른둘이라는 그의 나이입니다. 다른 나라엔 서른을 넘긴 선수들이 많지만 우리에겐 메달을 따고나면 은퇴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선수도 1990년대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면 이미 오래 전에 빙판을 떠났을 겁니다. 그러니 그의 노메달은 그를 위대한 도전정신의 본보기로 삼으려는 섭리인지 모릅니다.
이규혁 선수가 어떤 선택을 하든, 밴쿠버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빙판을 떠나든, 빙판 위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든, 4년 후 다시 한 번 올림픽에 도전하든, 저는 이 선수를 지지하고 응원할 겁니다. 물론 제가 가장 바라는 건 러시아 소치에서 열리는 2014동계올림픽의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에 출전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고작 서른여섯 살의 젊은 선수일 테니까요. 이규혁 선수에게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이규혁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