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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일기 270: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후 (2025년 12월 11일)
divicom
2025. 12. 11. 11:10
두어 해 전 제가 사는 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
문제를 일으켜 제가 잠깐 회장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대표회의 구성원들이 나이 많은 저를
회장으로 만들어 문제의 뒷수습을 맡기니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얘기를 이 블로그에 쓴 적이 있습니다.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때의 피로를 잊었는데, 며칠 전 고용노동부
서울서부지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를 일으켰던 회장이
자신과 자신이 관리사무소에 고용했던 딸과, 제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직원의 퇴직금을 달라고 진정을 냈는데 당시
회장이 저였기 때문에 제가 '피진정인'으로, 현재 회장이
참고인으로 지청에 출석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난생 처음으로 고용노동부 지청에 가서 세 시간 동안
조사를 받으니 머리가 깨질 듯 아팠습니다. 함께 간 회장도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조사받는 우리도 힘들지만
조사하는 감독관도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면 여러 사람이 고생하게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니 이 모든 일은 그때 그 회장을 너무나
믿어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을 왜 그리 믿었던가
하는 후회가 들려는 찰나, 오히려 제가 참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평생 사람을 믿고 살았는데 이렇게
세게 '발등을 찍은' 건 이 사람뿐이니까요.
제 행운을 생각하니 서부지청의 감독관들이 안쓰러웠습니다.
'특수경찰관'인 그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중엔 우리 아파트의
옛 회장처럼 별의별 문제 인물들이 다 있을 거고, 일의 특성상
감독관들은 늘 상대를 의심해야 할 테니까요. 저는 운 좋게
사람을 믿으며 살았지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누군가는 사람을 의심하는 일을 해야 할 겁니다. 그분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