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마음속 폭탄'이 터지는 이유 (2025년 11월 16일)
오후 산책길엔 영어유치원 아이들을 만나기 일쑤입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플라토(Plato)'라는 이름의 아주 큰
영어 학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원어민 교사들이
4세 안팎 아이들을 인솔하고 나오면 인도에 접한 차도를
따라 서 있던 노란 유치원 버스들이 문을 엽니다.
버스를 타지 않는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기다리던
엄마들을 따라 갑니다.
전에도 그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팠지만 엊그제
한국일보에서 본 글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 기사는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김효원 박사가 '성장통을 겪는 부모들'에게 4주에 한 번
쓰는 편지이자 조언입니다.
'플라토'는 기원전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그는 한국에서는 '플라톤'이라
부르는데, '서양 철학 2000년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을 정도로 서양 철학에
기여한 철학자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은 평생 자신 속에 내재하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대학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세워 어린이들을
괴롭히는 영어유치원을 보면 얼마나 분노할까요?
아래에 김효원 박사의 글을 옮겨둡니다.
맨 끝의 링크를 클릭하면 기사 원문을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유치원 숙제하느라 마음속 폭탄이 터질 것 같아요"
'D타운 엄마들'이라는 짧은 소설 시리즈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스레드'에서 한동안 화제였다. 한국 사교육 중심지인 강남 대치동에서
'영어 유치원'으로 불리는 영유아 대상 영어 학원에 자녀를 보내는
엄마들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마의 경제력과 학력이 얽힌
미묘한 과시와 열등감, 학원 정보 공유 및 인기 수업 등록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과 갈등이 생생하게 묘사돼 SNS에서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을 끈 것은 영어 유치원과 '7세 고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제 겨우 만 5세가 된 아이들의 SR 점수(영어 읽기
능력 테스트 점수)를 비교하면서 아이들을 서열화하고, 대치동 유명
영어 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인 7세 고시를 두고 경쟁하는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보다 성적이 좋은
아이의 엄마에게는 좋은 프렙학원(상위 단계 과정을 준비해주는 학원)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성적이나 과외 정보를 공유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다 따돌림을 당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는 지금 대치동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유아기 인지 발달은 '학습' 아닌 '놀이'로부터
유치원 입학 시즌이다. 부모가 아이를 어떤 교육 기관에 보내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기다. 그런 부모의 마음속에는 '다른 아이들이 모두
달리고 있는데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함께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앞서기를 바라는 욕망이 있다. 영유아
사교육에서부터 앞서가야만 명문대 진학, 좋은 일자리라는 정해진 성공
코스를 밟을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진다. 결국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모의 불안과 사회의 경쟁 논리가 만들어낸 살벌한
사교육 현장에 내던져지고 있다.
영유아 조기 사교육은 아이들의 발달과 정신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는 과도한 학업 부담과 성적 위주의 상대평가는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압박감을 준다. 'D타운 엄마들'에 나오는 아이가
그런 것처럼 틱, 화장실에 자주 가기, 손톱 뜯기, 머리카락 뽑기와 같이
스트레스로 인한 행동을 흔히 보인다. 두통, 복통, 소화 불량과 같은
신체적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진료실에서 "영어유치원 숙제를 하느라
마음속 폭탄이 터질 것 같아요"라고 말한 아이도 있었다. 성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환경은 아이들의 자아존중감도 낮춘다. 노력해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아이들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까지 경험한다. 과도한 학습 위주의 생활은
또래와의 자유로운 놀이 시간을 빼앗아, 사회성 및 정서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유치원에서 '영어' 대신 배워야 할 것
그렇다면 아이들이 조기 사교육 대신에 유치원에서 혹은 어린이집에서
정말로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 스스로 생각하고 학습하는 능력이다. 바깥놀이와 자유놀이를 통해서
주변의 사물과 현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하게 되고, 탐색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자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다양한 상황을 상상하며 창의적인 사고를 확장해가는
힘도 유아기에 그 기초를 형성한다. 사교육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탐구하고 사고하는 능력, 즉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교육이 중요하다.
둘째,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인식하고 말로 표현하는 능력을 꼭 배워야 한다.
요즘 아이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힘이 부족하다.
그래서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짜증을 내기도 하고 친구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말하면 말없이 위축되기도 한다. 좋은 교육기관에서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경험, 느낌, 생각을 말할 기회를 충분히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 의도, 감정을 고려하여 말하도록 가르친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는
아이가 나중에 영어로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협력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 생각, 입장이 자신과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배우는 것이다. 친구와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자신의 입장을 잘 설명하면서도 상대방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대화를 통해 화해하면서 앞으로의 상황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길러 가는 것도 꼭 필요하다.
넷째, 기본 생활 습관 및 자조능력이다. 식사 준비 및 정리, 손씻기, 양치질하기,
대소변 처리 등과 같이 아이가 자기 일을 해결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보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차분하게
앉아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다 같이 바깥놀이를 할 때는 활발하게
뛰어노는 것과 같이, 시간과 장소, 규칙에 맞게 행동하고 약속과 규칙을 지키는
태도도 유아기에 배워야 한다.
영유아기는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배우고, 놀고, 관계 맺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바탕이 되는 능력들이 자라나는 시기이다. 부모의 불안이나 욕심 때문에 아이들의
발달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교육기관을 선택할 때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것이 꼭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