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노년일기 269: 습관으로부터의 자유 (2025년 11월 9일)
divicom
2025. 11. 9. 18:24
지난달 하순에 눈병이 나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니 나아져서 살 만했는데,
자꾸 불편해지고 아픈 걸 보니 완전히 나은 게 아닌가
봅니다. 넣지 않던 안약을 다시 넣으면 좀 편해지니
다행이지요.
가만히 생각하니 책이나 글을 보지 않아야 나을 것
같은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침하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면 어리석다고 혀를 차던
제가 눈이 아프면서도 책을 보니 참 한심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습(習)'이 떠오릅니다. 몸에 밴
버릇이나 과거의 생에서 쌓은 '습'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고, '업(業)'과 윤회와 연결된다고 하지요.
도대체 책은 왜 읽는가 생각하니, 재미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틈만 나면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휴가를 내어 여행을
떠나듯, 저는 책 읽는 데서 큰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수십 년 동안 그 재미에 탐닉하여 눈이 고장 났을 텐데
여전히 책을 외면하지 못하니 '습'에 잡힌 바보입니다.
그래도 오후 산책길에 오르며 책을 고릅니다. 책을
고를 때는 원래 무게가 가벼운 책을 골랐는데, 오늘은
가벼우면서도 재미 없는 책, 그래서 별로 읽고 싶지
않을 책으로 고릅니다.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가 함께 쓴
<The Communist Manifesto(공산당 선언)>. 영국인
변호사 겸 번역가 사무엘 무어(Samuel Moore:
1838-1911)가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책으로, 소개와 자료를 곁들여 70여
쪽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어는 <자본론> 번역가로도 유명한데,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 선언>을 번역했지만, 무어의 번역본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으니 손이 저절로 책으로 갑니다.
이 책이 독일에서 출판된 건 1848년 2월, 마르크스가 29세,
엥겔스가 27세였다고 합니다. 거의 180년 전 젊은이들이
쓴 책, 그들의 두 배 이상 살며 별의별 이데올로기를 구경한
내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생각하며 펼쳤는데, 첫 장의 첫
문장이 머리를 탁 칩니다.
The history of all hitherto existing society is the history
of class struggles.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맞아, 지금 우리 사회도 그래. 계급의 형태와 투쟁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여전히 계급 투쟁의 역사를 쓰고 있어' 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을 위해 보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손이 갑니다. 칠십이 넘었는데 아직도 '습'을 끊지 못하느냐고
스스로를 야단치며 눈을 감습니다. 아, 아직도
습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리석은 노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