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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일기 266: 행복한 하루(2025년 9월 29일)

divicom 2025. 9. 29. 11:53

비 오는 어제 아침 쌈배추 겉절이를 만들었습니다.

통배추는 너무 비싸 살 엄두가 안 나고 쌈배추도

비쌌지만 좀 시들어 싸게 파는 것을 샀습니다.

시든 배추도 다듬어  물에 담가 두면 대개 살아납니다.

사람은 늙어 시들면 다시 젊어지지 못하는데,

배추가 사람보다 낫구나 생각하니 잠시 우울했습니다.

 

겉절이를 조그만 통에 덜어 담아 가방에 넣어 메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 밖에 사는 둘째 수양딸이 오고 있었습니다.

 

갈아탈 버스를 기다리며 전화를 걸어 옷을 단단히

입고 나오라고 말하기에 가방에 카디건 두 개를

넣었습니다. 자신이 한기를 느껴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싶어서지요. 무슨 색 옷을 입고 올지 모르니 

대비되는 색으로 하나씩 넣어 어울리는 색을 입게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딸이 사 주는 점심을 먹고 첫째 수양딸이 선결제해준

카페로 갔습니다. 둘째가 좋아하는 원두를 사고

따뜻한 라테를 마시며 첫째 얘기를 하다가 일요일인데도

회사에 나갔을 첫째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첫째는 회사에 있었습니다. 제 수양딸 1, 2호를 자처하는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둘째가 왔다고 하니 마침 일을 마무리하는 중이라던

첫째가 금세 달려왔습니다. 둘째와 제가 무엇을 마시고

있는지 모르는 데도 첫째가 라테를 주문했습니다. 우리

삼총사는 취향도 닮았구나 생각하니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제가 가져간 카디건 중 낙타색은 둘째에게 잘 어울렸고,

깊은 바다 빛 카디건은 첫째가 집에서 입고 온 것처럼

어울렸습니다. 입던 옷도 마다 하지 않는 수양딸들이

고마웠습니다.

 

웃음으로 가득한 카페의 시간 후엔 연희동 중국 식당으로

갔습니다. 둘째가 제게 점심을 샀다는 말을 들은 첫째가

저녁은 자신이 산다고 다짐하더니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계산을 했습니다. 어둠과 함께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고

둘째는 첫째의 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집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고 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만화 얘기, 육아 얘기, 국가전산망의 마비를 비롯한 나라 걱정,

미국 대통령의 횡포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누었던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의 시간이었나 생각했습니다. 서로를 발견하고

마음을 나눴던 2, 30년... 함께 울고 웃던 무수한 날들 덕에 

어제 같은 시간이 가능했겠지요...

 

그리고 오늘 아침 부엌에 가니 어제 담근 겉절이 통이

보였습니다. 뚜껑을 열고 맛을 보니 겉절이가 그새 익어 신맛이

났습니다. 어제 둘째에게 준 겉절이도 시었겠구나 한탄이 절로

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어,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김치 맛쯤은 망쳐도 할 수 없어, 금세 명랑을 회복했습니다.

둘째도 김치 맛에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치 통을 냉장고에 넣고 생각합니다, 늙어 시들어도 행복할 수

있으니 참 다행이구나! 

 

감사하며 기도합니다.

부디 행복하시라, 연진! 다영! 나의 두 따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