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대통령의 통역관 (2025년 8월 28일)

divicom 2025. 8. 28. 11:09

한국인이 영어로 밥벌이를 하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은 학교나

학원에서 영어 선생을 하는 것, 외교관이 되거나

기업체에서 외국과 관계되는 부서에 근무하는 것,

외국 언론사나 한국의 영자 신문에서 일하는 것,

통역이나 번역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영자 신문에서 12년, 통신사 국제국에서 3년,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4년 3개월 일하고

10여 권의 책을 우리말에서 영어로, 혹은 영어에서

우리말로 번역하고, 영어와 우리말로 쓴 시집을

출간한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영어로 먹고 

사는 한국인의 전형일 겁니다. 

 

중등학교 영어 교사 자격증을 가진 제가 교사 되기를

포기한 건 대학 4학년 때 했던 교생 실습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반짝반짝 귀여웠고 영어 수업은 재미있었습니다.

학생들도 저를 좋아해서 교생실은 물론 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습니다. 열 명의 교생을 대표해서 참관 수업을 하고

수업 평가 회의에선 '하늘이 내린 교사'라는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교사를 할 수 없었던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교사들에게 부과된 행정적 일이 너무

많다는 것, 둘째, 가난한 학생이 너무 많다는 것.

두 가지 다 제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고, 저는 교사

대신 영자 신문 기자가 되었습니다.

 

개인적 이유로 영어로 기사 쓰는 일을 그만둔 후

김태길 교수님의 <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 I, II.>

권을 영어로 번역하고 있을 때 유명한 통역사가 된

신문사 선배가 전화를 주셨습니다.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적은 번역을 뭐하러 하느냐며 통역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남 앞에 서는 것을 싫어하는 데다,

통역은 시간 여유가 없어 잘못된 것을 고치기 힘드나

번역은 그렇지 않으니 번역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 회담

장면이 보도되자 두 대통령을 위해 일했던 통역관들에

대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언론사들과

시민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 'Dr. Lee'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인 반면 이 대통령의 통역인 김원집 외교부

서기관에 대해서는 칭찬이 드뭅니다. 

 

심지어 김 서기관의 발음을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발음이 원어민과

비슷해야 외국어를 잘하는 게 아니고, 발음이 원어민과

비슷하지 않아도 외국인이 하는 말이나 쓴 글을 잘 

이해하고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뜻을 말과 글로 잘

표현하는 게 외국어를 잘하는 것이라고.  요즘은 일찍부터

원어민 교사에게 영어 발음을 배워 혀가 잘 꼬부라지는

한국인이 많지만 발음과 실력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저로선 트럼프 대통령의 통역이 한국 출신이라는 게 좀

서글펐습니다. 통역이든 누구든 국무부 고위직에서  

일하는 사람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한국 출신이라니까요.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간 것도 아닌 '한국인'이

미국 대통령의 통역으로 오래 일한다면, 그는 겉모습만

한국인일 뿐 뼛속까지 미국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그 사람을 칭찬하며 캄보디아에서

한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다 갑자기 통역으로 호출된

김 서기관을 깎아내리니, 참 씁쓸합니다. 혹시 김 서기관이

윤석열 대통령의 통역으로 일했던 전력 때문일까요?

 

아니 어쩌면 오래 전부터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오류가 

여전히 작동 중일지도 모릅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판단하지 못하는 오류입니다.

 

행정적인 일 치다꺼리하느라 가르치는 일에 쏟을 에너지를 

낭비해야 했던 교사들이 이제는 '권리 지상주의'에 빠진 

학부모들의 '금쪽 같은 내 새끼' 편들기 때문에 교직을 떠나는 

게 그 증거입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가난한' 학생의 수는

줄었을지 몰라도 어리석은 한국인의 수는 늘어났다고

느끼는 게 저 한 사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