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 8

12월 (2022년 11월 30일)

십이월아 어서 와 빗물 세수 덕에 그나마 말개진 세상 속으로 한 장 달력처럼 가볍게 어쩌면 하얀 망토에 앉아 영하 추위를 몰고 와 십이월아 어서 와 낙엽마다 음각된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 가벼워졌으나 무거워진 징그럽게 시끄러운 헌 것들의 새 세상으로 숨죽여 우는 사람들에게로 억지로 웃는 사람들에게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사람들에게로 십이월아 어서 와

나의 이야기 2022.11.30

노년일기 144: 나이테 (2022년 11월 25일)

낙엽 몰려다니는 길을 걷다 보면 문득 고개 들어 저 높이 나무의 정수리께를 보게 됩니다. 높아지느라, 속으로 영그느라 이렇게 버리는구나... 인생의 겨울에 들어선 사람들은 대개 자라기를 멈추지만, 나무는 겨울에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는구나... 20년 넘는 억울한 옥살이, 그 겨울 같은 시절에도 자신을 키우신 신영복 선생. 선생의 에서 같은 마음을 발견했기에 아래에 옮겨둡니다. 1984년 12월 28일 대전교도소에서 쓰신 글에 '나이테'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2016년 1월 15일 저세상으로 떠나신 선생님, 지금은 어디에서 '자라고' 계신지요? "나무의 나이테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나무는 겨울에도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겨울에 자란 부분일수록 여름에 자란 부분보다 훨씬 단단하다는 사실입니다...

동행 2022.11.25

노년일기 143: 아름다운 것이 스러질 때 (2022년 11월 21일)

세상에서 제일 빠르던 엄마의 걸음이 자꾸 느려질 때 스승 같은 선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 용서 대장이 어느 날부터 노여움 대장이 될 때 새 절 기와 같던 머리칼에 눈꽃 하얀 걸 볼 때 명문 자랑하던 친구가 저잣거리 흔한 여인이 될 때 여러 날 걸려 핀 꽃이 하루 환하다 지기 시작할 때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집이 굉음 속에 무너질 때 가슴 속에 무엇 무거운 것들이 하나씩 자리 잡아 나도 엄마처럼 느려지다가 .. 가을 하늘 한 번 올려다보니 문득 가볍네!

나의 이야기 2022.11.21

큰 나무 아래 (2022년 11월 17일)

오는 토요일 아름다운서당의 서재경 이사장 님이 스스로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십니다. 2005년 그분이 만드신 아름다운서당 (아서당)이 천 명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는 동안 한국 사회는 무던히도 변했습니다. 사회가 변하니 아서당에 오는 학생들과 자원봉사하는 교수들도 변했습니다. 그래도 서재경 이사장 님의 진심과 성심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분도 저처럼 한국일보사 견습기자 출신으로 서울경제신문에서 근무하셨지만 얼마 되지 않아 기업으로 옮기셨습니다. 신문사 선후배로는 만나지 못했던 분을 자유칼럼그룹에서 만났고, 선배님과 제가 그곳을 떠난 후에는 아서당에서 인연을 이었습니다. 반면교사는 많아도 스승은 적은 세상에서 큰 나무 같은 선배님을 만나 그 그늘 속에 머물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아서당을 거..

동행 2022.11.17

노년일기 142: 시선 (2022년 11월 12일)

아버지가 뗏목 같은 요에 누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시기 전 앉으시던 안락의자, 그 의자 아래 방바닥에 앉아 자꾸 붓는 아버지의 종아리와 발을 내 어깨 위에 올려두고 죽어라 주무르던 날들, 짐짓 명랑한 척 종알대는 나를 내려다보시던 그 시선, 그 시선 뒤 영영 떠날 마음, 그 외로움 전혀 내비치지 않으시고 잔잔히 웃으시던... 언제부턴가 내 시선 속에 그 시선 같은 것이 안개처럼 혹은 초미세먼지처럼 스미어, 살아갈 사람들은 앞과 위를 보지만 살아온 사람들의 시선은 뒤와 아래로 향하는 것이, 지기 시작한 꽃의 마른 목처럼 길에 뒹구는 낡은 돌 끌어안는 저녁 이슬처럼... 아버지의 약한 육신은 굳건하고 청청한 정신을 몹시도 괴롭혔지만 아버지는 평생 단 한 번도 아프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니 고통 또한 그 ..

나의 이야기 2022.11.12

우리집은 감나무 집 (2022년 11월 8일)

오랜 친구가 보내준 고창 단감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둘째 수양딸의 어머님이 고흥 단감을 한아름 보내주셨습니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맛은 한결같이 좋아서 사람도 단감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감들 중엔 피부가 연예인들처럼 곱고 반짝이는 감도 있지만, 검버섯과 기미 앉은 제 얼굴처럼 얼룩얼룩하고 군데군데 패이거나 멍든 감도 있습니다. 그래도 단감이라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감은 없으니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건 사람뿐인가... 부끄럽습니다. 우리집엔 감나무가 없지만 감마다 감나무의 生과 추억이 배어 있으니 우리집은 어느새 감나무 집입니다. 감을 들여다보면 여름 끝 푸른 감 사이를 흔들던 바람과 감의 몸에 알알이 박히던 햇살과 비의 알갱이가 보이는 듯합니다. 문성님, 이순 여사님,..

동행 2022.11.08

노년일기 141: 치과, 무섭지 않아! (2022년 11월 6일)

한 2주 전 입안 오른쪽 깊숙한 곳에 있던 윗니 일부가 부서졌습니다. 너무 낡아 자연히 부서져서인지 통증도 없었습니다. 가기 싫은 치과, 마침 몸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감기를 핑계로 차일피일하다가 영화 '캐스트어웨이 (Cast Away)'가 떠올라 용기를 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척 놀런드는 비행기 추락 사고로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데, 치과 치료를 미뤘던 까닭에 스케이트 날과 바위로 스스로 문제의 이를 빼야 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마침내 어제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양심 치과 명단'에 있는 치과가 있어 찾아갔습니다. 2대 째 하는 치과라 했습니다. 손님 수도 적당하고 직원들도 가만가만해 좋았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제 이들도 꼭 저만큼 늙어 있었습니다. 우선 코로나 19로 하지 못했던 스케일링을 하..

나의 이야기 2022.11.06

노년일기 140: 신발의 주인들 (2022년 11월 2일)

며칠 전 몸에 들어온 감기가 아주 함께 살자 합니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 소식을 접한 후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감기의 힘이 더 강해지나 봅니다. 웬만하면 해 떠 있는 시간에는 눕지 않지만 직립이 힘들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까무룩 눈 감았다 깨어보니 긴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제 몸에 앉았습니다. 그 먼길을 왔는데도 햇살은 따스합니다. 문득 신문에서 본 이태원의 신발들이 떠오릅니다. 수십 켤레인지 수백 켤레인지 주인을 잃은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쪼르르 바랜 길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신발들에도 이 햇살이 담기겠구나, 그 신발을 신고 가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언제부턴가 한국인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되었고, 애도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도 흰머리와 ..

나의 이야기 2022.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