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 11

유월이 오면 (2022년 5월 31일)

오월은 사월보다 스물네 시간이나 길었지만 새로이 깨달은 것은 두엇뿐입니다. 저만치 유월의 정수리가 보입니다. 유월엔 오월에 놓친 것들을 찾고 싶습니다. 영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브리지스 (Robert Bridges: 1844-1930)의 노래처럼 유월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의 보따리를 선물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그 선물을 찾아내는 건 우리에게 달려 있겠지요. 의사이며 시인이고 많은 찬송가를 쓴 브리지스... 그를 보며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상기합니다. When June Is Come When June is come, then all the day I’ll sit with my love in the scented hay: And watch the sunshot pal..

오늘의 문장 2022.05.31

노년일기 121: 행복한 삶 그리고... (2022년 5월 28일)

요즘 곁에 두고 있는 책은 달라이 라마의 입니다. 이 책의 제목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든 것 두 가지, '행복한 삶'과 '고요한 죽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도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들처럼 아파트와 차, 돈, 직업, 학력, 인맥을 가지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나만 뒤처지는 것 아닌가 늘 마음을 쓰며 홀로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지요. '고요한 죽음'은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흔쾌히 맞는 죽음을 뜻할 겁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변에선 아흔 넘은 사람들조차 죽음을 준비하기보단 삶을 즐기는 데 열중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죽음은 남의 일일뿐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

나의 이야기 2022.05.28

참말 (2022년 5월 26일)

지난 4일 '고도원의 아침편지'에 졸저 의 한 구절이 인용됐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람은 참말을 한다고 믿고 싶다"라는 구절입니다. 24쪽에서 26쪽에 게재된 '나쁜 짓'이라는 제목의 글을 한 줄로 요약하여 27쪽에 출판사 (서울셀렉션) 편집진이 보라색으로 써넣은 것입니다. 제 책들이 대개 그렇듯 도 제 인격만큼 작은 책이고 많이 팔리지 않지만, 저는 이 보라색 표지의 책을 좋아합니다. 멀리 사는 친구가 아주 좋아하는데다 출판사 편집진이 이 책에 보여준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책을 내고 나면 늘 부끄럽습니다. 제 책들은 대부분 벌거벗은 마음을 드러내니까요. 위안을 주는 건 오직 한 가지, 책에 실린 말이 다 '참말'이라는 겁니다. 인격이 훌륭해서가 아니고 '참말'이 '거짓말'보다 쉬워서 '참말'을 합니..

동행 2022.05.26

노년일기 120: 큰일이네, 이렇게 복을 받았으니! (2022년 5월 23일)

아침에 일어나면 잠시 눈을 씻고 제가 아는 사람들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이름들을 떠올리다 보면 돌부리가 발을 붙잡듯 저를 붙잡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럴 땐 한참 그 이름에 머뭅니다. 그리곤 둘째 수양딸이 보내준 공진단 한 알을 먹습니다. 금빛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보면 누군가의 약손이 몸과 마음을 두루 어루만져주는 것 같습니다. 둘째 아기 출산을 준비하느라 바쁜 중에 제 건강을 걱정해 보내준 약입니다. 혈색 좋은 얼굴로 아기를 보러 가고 싶습니다. 밥은 무안의 최 선생님이 보내주신 우렁이쌀로 지은 것입니다. 고소한 귀한 쌀밥을 먹다보면 '밥이 보약'이라는 옛말이 참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친구가 가져다준 참기름은 아깝지만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친구가 좋아할 테니까요...

나의 이야기 2022.05.23

노년일기 119: 나, 수레국화 (2022년 5월 20일)

홍제천변을 잉크빛으로 물들인 수레국화들을 보면 아주 작은 몸이 되어 그 사이에 들어가 서고 싶습니다. 수레국화들 사이에서 시치미 떼고 그들과 함께 바람을 그리고 싶습니다. 함께 걷던 친구가 풀밭에 떨어진 수레국화 한 송이를 집어 줍니다. "보셨지요? 꺾은 게 아니고 떨어진 걸 주운 거예요." 결벽증도 때로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장 작은 병도 수레국화 한 송이에겐 너무 큰집. 하얀 휴지 한 장을 접어 넣고 물을 담습니다. 휴지를 딛고 선 수레국화가 제법 꼿꼿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어찌 그리 아름다우신가' 탄식합니다.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저 선명한 잉크 꽃잎이 마냥 지속될 것만 같습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어느 날 문득 꽃잎의 끝이 하얗게 바래기 시작합니다. 하양이 아래로 아래로 흘..

나의 이야기 2022.05.20

이기적인 아이의 기도 (2022년 5월 17일)

사랑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처음 보는 순간 '이 사람이다!' 하고 빠져들게 하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늘 만나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다 그가 떠난 후에야 사랑이었음을 아는 일도 있습니다. 셸 실버스틴(1930-1999)에 대한 저의 사랑은 뒤늦은 사랑입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엔 존재조차 알지 못하다가 그가 떠나고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어쩌면 그는 저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많을 것을 알고 그렇게 많은 시와 그림과 책을 남긴 것인지 모릅니다. 큰사람이 작은 사람을 위로하는 방식이지요. 그를 가까운 친구에게 소개했더니 그도 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 친구가 사다준 셸의 책을 열 때는 기대와 슬픔이 동시에 찾아옵니다. 그의 반짝이는 위트와 그 위트가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났음을 깨닫는..

오늘의 문장 2022.05.17

배우 강수연, 스타 강수연 (2022년 5월 14일)

이 나라의 저명인들 중엔 텔레비전과 영화, SNS에서 하하호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엔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얼굴을 자주 손보아 '방부제 미모'를 자랑하는 배우들도 있고 명가나 명문대 출신임을 자랑하는 가수들도 있습니다. 그들을 볼 때면 늘 '그대들은 돈은 많은데 가오가 없구나' 생각합니다. 즉, '스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럴 때 위로가 된 건 지난 7일 세상을 떠난 배우 강수연 씨 (1966-2022)였습니다. 일찌기 영화사를 쓴 그는 하하호호도 하지 않고 광고에 출연하지도 않았습니다. 꼭 필요한 자리에서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엔 그의 큰 발자국만큼 큰 허공이 남고 사람들은 벌써 '거인 강수연, 대장부 강수연'을 그립니다. 아래 글에서 제 마음과 똑같은..

동행 2022.05.14

노년일기 118: 청둥오리처럼! (2022년 5월 11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있어서일까요? 한국은 '길들이는' 나라입니다. 남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며 비슷한 목표를 좇고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야 살기도 쉽고 소위 '성공'이란 걸 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니 각기 다른 사고와 경험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집단 지성'의 효과보다는 비슷하게 살며 '집단 편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집단 우둔'을 초래하는 일이 흔합니다. 거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야성미를 풍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야성'은 '자연 그대로의 성질'을 말하는데 오늘의 한국에선 어린이들에게서조차 자연스런 천진함보다 어른스런 눈빛이 자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생물들 중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종'들이 있듯이 야성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특질입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여기..

나의 이야기 2022.05.11

신부님의 실수 (2022년 5월 9일)

지난 주 오랜만에 명동에 나갔습니다. 명동성당 파밀리아홀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가는 길, 오는 길, 결혼식... 두루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작년 어느 날인가 갔을 때 텅 비어 있던 명동 중앙로가 노점상들과 행인들로 북적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이스크림과 석쇠구이 꼬치를 파는 노점들 주변엔 먹느라 바쁜 사람들이 많았고, 달고나를 만드는 상인 앞에도 기다리는 사람이 여럿이었습니다. 결혼식도 여러모로 새로웠는데, 몇 해 전 혼례와 공연을 위해 새로 지은 파밀리아홀은 성당보다는 개신교 교회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혼례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도 신부님이라기보다는 목사님 같았습니다. 그동안 신부님과 목사님을 접하며 느낀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목사님..

동행 2022.05.09

대만을 배울 시간 (2022년 5월 6일)

저는 대만을 좋아합니다. 온화한 기후도 좋고 그 기후 같은 사람들도 좋습니다. 10년 전인가 국제회의 참석 차 가본 대만은 외화내빈 (外華內貧)적 한국과 정반대여서 좋았습니다. 정신없이 빠르고 현란한 서울과 달리 담담해 보이는 타이페이가 편했습니다. 피로해 보이거나 너무 바빠 보이는 한국인들과 달리 밝고 여유로워 보이는 시민들도 좋았습니다. 밤늦게 지방에서 돌아와 대만 외교부가 타이페이 공항 부근에 잡아준 Pearl Hotel에 들어갔습니다. 호텔 부근이 예전 사회주의 국가처럼 어두웠습니다. 좁은 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프론트데스크였는데, 그 데스크도 작고 그 앞 로비 비슷한 공간도 좁고 장식 또한 매우 조촐했습니다. 한 사람뿐인 듯한 직원에게 내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하니 모닝콜과 택시 대기를 부탁..

오늘의 문장 2022.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