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 13

노년일기 117: 4월 끝 붉은 눈 (2022년 4월 30일)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물러갔다는 거짓말로 즐겁게 시작했던 4월... 붉은 눈으로 지난 한 달을 돌아봅니다. 꽃과 나무, 대지, 사람... 갈증을 느끼지 않은 존재가 하나도 없었을 한 달, 억울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날들... 나날이 중력이 가중되어 이것 저것 버렸지만 새 화분들이 들어오며 가족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무릎 꿇을 힘이 있는 날은 매일 아침 '제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 제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주십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해주십사'고 기도했지만 기도가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중력을 이기지 못한 눈의 실핏줄이 터졌습니다. 처음 보는 빨강이 흰자위를 물들였는데 세상의 빛깔은 여전합니다.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을 지켜보며 4월의..

나의 이야기 2022.04.30

노년일기 116: 이방인 (2022년 4월 28일)

매일의 습관 중에 잠만큼 신기한 게 또 있을까요? 늘 눕는 자리에 옆으로 누워 눈을 감은 채 어둠을 응시하면 검은 먹물이나 연기 같은 것이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부터 서서히 퍼지고, 마침내 시야 전체가 검정에 먹히는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죽음 비슷한 삶, 혹은 잠의 세계로 들어서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래 전 죽은 이가 찾아오기도 하고 산과 산 사이를 날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의 끝은 언제나 각성. 이불을 걷고 일어납니다. 때로는 낮에 본 풍경들과 얼굴들이 응시를 방해합니다. 잠은 완성할 수 없는 그림으로 남고 새벽이 졸린 눈을 비빕니다. 그럴 땐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하듯 오늘 못 잔 잠은 내일 자면 됩니다. 일어나 앉은 사람 옆에 누군가가 누워 있습니다. 푹..

나의 이야기 2022.04.28

<어린 왕자>를 읽는 시간 3 (2022년 4월 25일)

'사랑'은 무엇일까요? 늘 보고 싶은 것. 함께 있고 싶은 것. 자꾸 뭔가를 주고 싶은 것. 그를 위해 내 시간을 낭비하는 것. 21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여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And he went back to meet the fox. "Goodbye," he said. "Goodbye," said the fox. "And now here is my secret, a very simple secret: It is only with the heart that one can see right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the little prince repeated, ..

오늘의 문장 2022.04.25

한승헌 변호사 님 별세 (2022년 4월 22일)

한승헌 변호사님이 지난 20일에 돌아가셨음을 오늘 아침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부음을 접하는 순간 세상이 기우뚱하는 것 같았습니다. 2015년이었던가요? 제가 '즐거운 산책 김흥숙입니다'를 진행하던 tbs 교통방송의 남산 사옥 1층 로비에서 변호사님을 뵈었습니다. 인터뷰에 출연하시기 위해 변호사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1층 로비 카페에서 한참 기다린 끝에 뵈었지요. 그때 이미 여든을 넘기신 어른이셨지만 변호사님은 소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응시하시며 엷지만 밝은 미소로 긴장을 풀어주셨습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가 변호사님을 존경하오니 사인을 한 장 해주십시오 하고 A4 용지 한 장을 내밀자, 변호사님은 우아한 필체로 '선과 악이 모두 스승'이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써주셨습니다. 아이의 방에 갈..

동행 2022.04.22

노년일기 115: 낙타처럼 걷기 (2022년 4월 20일)

오늘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아직도 장애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입니다. 정신 장애는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 장애 또한 모두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입니다. 누구도 장애의 가능성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소위 건강한 신체를 가진 비장애인이 사고를 만나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젊어서 건강했던 사람이 나이 들며 각종 장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장애인들이 출근 시간 지하철의 운행을 방해하는 시위를 벌여 비난받은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자신의 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그들을 비난할 수 없을 텐데... 참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애가 생기면 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할 ..

나의 이야기 2022.04.20

김대중 대통령의 쉰 목소리 (2022년 4월 18일)

김택근의 묵언 성공한 대통령이 있었다 김택근 시인·작가 2008년 10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10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사본을 흔들며 김대중 비자금의 일부로 추정된다고 수사를 촉구했다. 퇴임 대통령 김대중은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김택근 시인·작가 “한나라당 검사 출신 국회의원이 내가 100억원의 CD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있다고. 간교하게도 ‘설’이라 하고 원내 발언으로 법적 처벌을 모면하면서 명예훼손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사상적 극우세력과 지역적 편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음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고 나를 지지하는 많은 국민이 있다. 그리고 당대에 오해하는 사람들도 ..

오늘의 문장 2022.04.18

잃어버린 언어 (2022년 4월 16일)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인천과 제주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세월호가 전복돼, 삼백 여 명이 사망, 실종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박근혜 씨가 대통령 직에서 파면되고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구할 수 있었던 세월호의 승객들을 왜 구하지 않았던 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소위 MZ세대 한국인들을 기성세대 한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게 된 데는 세월호 사건이 큰 역할을 했을 겁니다. 믿었던 어른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걸,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가르쳐준 세월호 사건... 추모도 위로도 오직 말에 그치는 것... 입을 닫습니다. 셸 실버스틴이 '잊어버린 언어 (Forgotten Language)'라고 표현한 것은 어른이 되어가며 잊어버린 감수성을 뜻하겠지만, 우리..

오늘의 문장 2022.04.16

<어린 왕자>를 읽는 시간 2 (2022년 4월 13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마트가 문을 열었습니다. 대학 캠퍼스에 지은 상가 건물 1층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입니다. 대학들이 캠퍼스 안에 상가를 만들어 수익사업을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식당이나 카페, 영화관 같은 게 아니고 이마트라는 게 좀 어색합니다. 어쩌면 이마트의 캠퍼스 입점이 어색한 게 아니고 그것을 어색하게 느끼는 제가 풍조에 뒤진 거겠지요. 이마트와 동네 수퍼들의 차이는 무엇보다 '관계'일 겁니다. 이마트를 자주 간다 해도 '단골'을 알아보는 직원은 드뭅니다. 이번에 새로 생긴 이마트에선 계산원 자체를 보기 힘듭니다. 마트 한 쪽에 계산원을 대신해 계산해 주는 기계들이 죽 놓여 있습니다. 소위 '4차 산업혁명기'에는 가상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관계를 대체합니다. 어떤 사람..

오늘의 문장 2022.04.13

<어린왕자>를 읽는 시간 1 (2022년 4월 11일)

방송에도 신문에도 얼굴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어제 발표한 장관 후보자들입니다. 저만큼 낡은 얼굴들... 시선을 돌립니다. 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동무가 미국에서 사다준 선물을 펼칩니다. 캐더린 우즈(Katherie Woods: 1886-1968)가 영어로 번역, 출간한 생텍쥐페리 (Antoine de Saint-Exupéry: 1900-1944)의 입니다. 1943년 프랑스어 원서와 함께 출간되어 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 기여한 책입니다. 하드커버를 싼 겉표지가 누렇게 바랜 채 너덜너덜합니다. 80세가 되어가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우즈는 원서 4장에 나오는 'ami (친구)'를 'sheep(양)'으로 번역해 훗날의 번역자들과 독자들에게 'sheep test'라는 재미있..

오늘의 문장 2022.04.11

노년일기 114: 태어나지 않을 거야 (2022년 4월 8일)

고통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어떤 상태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놓여나 다시 밥을 지어 먹게 되었습니다. 원래도 먹는 일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 꾸미는 일 같은 것에 큰 흥미가 없었지만 심하게 앓고 나면 더더욱 생(生)의 열기란 것이 징그럽게 느껴집니다. '다시는 태어나지 말자, 이 소음과 현란 속으로 다시는 오지 말자' 마음먹고 먼 데 하늘을 바라봅니다. 얼마 전에 이 블로그에 소개한 바 있는 미국 시인 셸 실버스틴 (Shel Silverstein)도 비슷한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의 시집 에 실린 '난 부화하지 않을 거야 (I Won't Hatch)'라는 시가 그 증거입니다. I Won’t Hatch! Oh I am a chickie who lives in an egg, But I will not ha..

나의 이야기 2022.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