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자랑스러운 기부왕 이수영 선배 (2020년 7월 24일)

divicom 2020. 7. 24. 15:21

이수영 선배를 처음 뵌 건 1977년인가 1978년입니다.

당시 한국일보그룹에는 일곱 개의 언론사가 있었는데

이 선배님은 서울경제신문에서 재계를 출입하시고

저는 코리아타임스 사회부 병아리 기자였습니다.

 

언론사에 여기자가 많지 않던 시절, 한국일보그룹의

신문과 잡지에는 다른 언론사보다  여기자가 많았고

바쁜 중에도 가끔 만나 밥과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이 선배님은 당당한 태도에 직설화법을 구사하셨지만

따스한 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배님은 매니큐어에 대한 저의 편견도 깨뜨려 주셨습니다.

요즘은 네일아트가 유행이고 매니큐어 하는 사람이 많지만

당시엔 매니큐어를 하는 사람이 드물었는데 선배님은 늘

손톱을 빨갛게 칠하고 다니셨습니다. 별로 멋을 내지도 않는

분인데 왜 그러실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직접 여쭸더니

"아, 손톱에 때가 껴서 그래. 내가 농장일을 하는데 손톱밑에

낀 흙때가 잘 안 지워져." 새빨간 매니큐어가 노동의 흔적을

감추는 데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이 선배님이 카이스트에 676억 원 상당의

자산 기부를 약정하셨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역시 이 선배!’ 하는 생각과 동시에 선배님이 당시 20대였던

제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 혼자 웃었습니다.

 

“야, 너 애인 있어?”

“네.”

“대학 때 사귄 애야?”

“네.”

“야, 차버려!”

“네?”

“차버리면 내가 재벌가 소개해줄게.”

“네?”

“너 결혼할 거 아냐? 헤어져.”

“전 결혼 생각 없는데요... 혹시 하게 되면 그 사람하고 할 거고...”

“야, 누가 학교 때 사귄 남자랑 결혼하냐, 헤어져.”

 

혹시 지금 선배님을 다시 뵈면 ‘거 봐라, 내가 뭐랬니, 그러니

헤어지랬잖아?' 하실지 모르지만, 제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건

룸메이트의 잘못이 아니고 제 탓입니다. 오래 전 강남으로 가자던

그의 말을 안 듣고 강북을 고집한 게 저이니까요.

 

어쨌든 오랜만에 지상에서 뵌 이수영 선배님,

여전히 당당하신 모습, 참 반가웠습니다.

선배님, 부디 오래 건강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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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2007232041005

 

이수영 회장 세 번째 기부 약속 “카이스트서 노벨상을”…“뜻 이뤄드릴 것”

기자 출신 축산·부동산 사업가…현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
“과학기술 영재 양성 통해 대한민국의 이름 세계에 알려달라”

 

“카이스트(KAIST)에서 꼭 국내 첫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도록 해주세요.”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83)은 23일 676억원 상당의 사재를 내놓으며 이렇게 당부했다. 2012년 미국에 있는 8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부하기로 하며 카이스트와 인연을 맺은 이 회장이 세 번째 기부를 약속했다.

 

2016년 미국에 있는 10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후 기증하기로 유증한 지 4년 만에 다시 평생 모은 재산을 카이스트에 내놓기로 한 것이다. 고액 기부자가 많은 카이스트에서도 이 회장의 기부액은 역대 최고 금액이다. 지금까지 약정한 기부액을 모두 합하면 766억원에 이른다. 카이스트 역대 고액 기부자로는 2008년 578억원을 기부한 고 류근철 박사와 두 차례에 걸쳐 515억원을 내놓은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 등이 있다.

 

이 회장은 이날 카이스트에서 열린 기부 약정식에서 “세상만사는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난다. 카이스트는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을 이끌 영재를 키워야 한다”며 “세계적인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이는 일에 값지게 써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2012년 첫 기부 당시에도 이 회장은 “언젠가는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리라 생각했고, 국가 발전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카이스트를 선택했다”며 “과학기술이 대한민국 발전의 힘이고, 그 원동력은 카이스트라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당시까지는 이 회장이 카이스트와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는 법대를 졸업한 기자 출신 사업가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신문에 입사했다. 이후 한국경제신문과 서울경제신문을 거치며 1980년까지 기자 생활을 했다. 기자로 일하던 1971년 광원목장을 설립해 축산업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고, 1988년 광원산업을 창업해 부동산 사업가로 많은 자산을 모았다. 첫 기부 이후 2013년부터는 카이스트발전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카이스트는 이 회장이 기부한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기금으로 출연해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할 예정이다. 재단 수익금은 기부자의 뜻에 따라 ‘카이스트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들을 지원하는 노벨상 연구 기금으로 사용된다. 카이스트 싱귤래러티 교수는 과학 지식의 패러다임을 바꾸거나 인류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독창적 과학 지식과 이론을 정립할 연구자를 선발해 지원하는 학내 제도다. 카이스트는 이 제도를 통해 교내 연구진의 노벨상 수상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싱귤래러티 교수로 선정되면 최대 20년까지 연구비를 지원받아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확보할 수 있다.

 

신성철 카이스트 총장은 “평생 피땀으로 일군 재산을 아낌없이 내놓은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며 “카이스트의 역할과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마음에 새기고 기부자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구성원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 기쁘다”며 “대한민국의 미래와 나라를 위하는 뜻을 가진 분들이 기부 문화 활성화를 위해 더 많이 동참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